Still Life With Red And White Currants
¶ 페어명
L.R.C
A.L.R
입학식이란 본디 다른 날에 비해 유독 분주하고 활기차기 마련이었다. 방학식이나 개학식 때에도 어김없이 인파가 몰렸지만 감정적인 이유로서 그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입학식은 이제껏 알지 못한 생경(生硬)한 소속에 들어선다는, 그 생소함과 낯섦에서 비롯한 분홍빛 들뜸이 장내를 가득 에워싸고 있었다. 비슷비슷한 키에 보송보송한 솜털.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회로 첫걸음을 내딛게 될 이들의 통통 튀는 감정에는 그 나이대의 독특한 향이 있었다. 어린이들의 활력과 생기는 기대와 떨림으로, 이 초가을의 바람을 타고 발산력 좋은 향수처럼 삽시간에 주위로 퍼져나갔다. 그럴 때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게 이날만은 나도 저러던 때가 있었지, 라며 과거를 되짚어보곤 하는 것이다. 제 일생에서 그날이 좋았든, 좋지 않았든 실바람을 따라 불어오는 낭만에 잠겨 오늘만큼은 신입생마냥 괜스레 설레게 되는 날이었지만, 앞서 말했듯 사람마다 그 반응은 천차만별이었다. 같은 새내기라고 해도 학교생활에 두는 기대와 흥미가 애초부터 그다지 없는 이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기차 내부에서도 웅성거리는 높은음들이 허공에 오선보를 그려내고 있었다. 차차 늦여름이 가시고 코를 간질이는 단풍이 찾아올 시기. 여름의 막바지를 장식하듯 단비가 내리던 어젯밤의 여운 탓인지 촉촉한 습기가 공기에 서려 시원한 바람이 열린 창 사이로 물씬 밀려들었다. 누군가에겐 경쾌하고도 밝게 느껴질 아이들의 대화도 누군가에겐 심기를 거스르는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A의 은빛 머리칼이 어딘가에서 흘러들어온 부드러운 미풍에 흐트러지듯 가볍게 흩날렸다. 섬세하디 얇은 선으로 그린 듯한 머리카락은 오후의 윤슬, 야밤의 달빛과 같이 오묘한 광택을 품고 있었다. 객실에 들어선 이래로 한 번도 창문을 연 적이 없던 A은 이 지나치게 격양된 분위기가 참으로 격식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그리 좋다고 꺅꺅거리는 건지, 자기 성량도 제대로 조절할 줄 모르는 이들과 함께할 학교생활이 기대될 리 만무했다. 창밖을 무료하게 내다보던 푸른 눈동자는 문득 투명한 창에 비친 갈색빛의 나무 문을 건너다보았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간질이던 바람의 정체는 열린 문틈 사이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L는 처음부터 별다른 목적을 가지고 이 5번 객차에 들어선 건 아니었다. 더구나 A이 있는 객실에는 더더욱 어떠한 고의성을 가지고서 들어선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L는 함께 동승한 이나 호그와트에 도착할 동안 대화를 나누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 이도 딱히 없었다. 어차피 다들 처음 보는 자리일 텐데, 부모들끼리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서로에 대해 무지하다는 면에서 출발선은 같았다. L는 생판 처음 보는 이와 부대끼지 않고, 그래서 사람 하나둘 정도만 있는 다소 여유로운 편에 속하는 객실에 앉아 여유롭게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만 있다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이야 누구든 좋았다. 객실 옆, 복도를 향해 뚫린 세로로 난 창을 통해 방의 분위기를 훑어보며 복도를 거닐던 L는 어느 방 앞에 멈춰 섰다. A 혼자 창가에 앉아 이 소란스러운 시간을 고요히 죽이고 있던 객실이었다. L는 시선을 복도 저 끝으로 흘려냈다. 다른 방은 이미 서너 명 정도 무리를 이룬 뒤였다. 간단한 담소나 나누며 사전탐색을 하기에는 적당해 보였다.
L의 신코는 이미 A이 있는 객실을 향해 돌아가 있었다. L의 탁한 눈동자가 깨끗한 창에 비쳤다. 막상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미묘한 이질감을 들었다. L가 보기엔 저를 둘러싼 이 모든 환경과 -밖에서 들려오는 조잘거림, 생기 따위 말이다- 고리타분하게 오냐오냐 자랐을 도련님상의 A은 상당히 이질적이라서, 오히려 이 방에 홀로 앉아있는 그가 열차를 잘못 탄 게 아닐까 하는 위화감이 컸다. 그리고 아마 이런 불편한 부조화를 저만 느낀 건 아닌 것 같았다. 다른 이들이 이 객실에 들어오지 않은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겠나. 냉한 표정을 짓고서 티끌 하나 묻지 않는 창으로 저를 웬 초대받지 못한 곳에 들어온 이방인인 마냥 건네는 무정한 시선이 그런 그의 생각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었다면 도리어 기가 죽어 다른 객실로 발걸음을 옮겼을지도 모르지만, L는 오히려 그 눈길에 응답하듯 객실 내로 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것이 L가 다른 아이들과 다른 점이었다. 평범하지만은 않은 그의 성정 말이다. 대놓고 싫다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원체 타인에게 무심한 L로선 그의 그런 태도가 크게 거슬리지도 않았다. 또한, L는 A의 비위를 맞춰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디 가서 눈치 없다고 들어본 적도 없었을뿐더러 -애초에 집안의 영향이 크겠지마는- L가 남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상황에 놓인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L의 집안, C은 태생부터 제 자녀를 모지게 대하여 기를 죽이는 이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 내부의 호전적인 성향을 숨긴 채, 미소를 지으며 적절한 시기를 노리는 금수이자 맹호에 걸맞은 이들이었다. 그러니 그 집안에서 난 자식들이 제아무리 오만해봤자 기본적인 사회성이야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혈통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저도 순수혈통의 유서 깊은 가문이었지만, 어디 가서 나 잘났소. 티를 내지는 않는단 말이었다. L에게 있어 A의 첫인상을 일컫자면 그래, 이때까지만 해도 슬리데린. 딱 그 정도였다. 기숙사 배정을 하기도 전에 그가 어느 기숙사에 가게 될지 눈에 선했다. 아직 말 한마디 섞지 않았지만, L는 어쩐지 A과 자신의 관계가 그리 원만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
제 생각이야 어떠하든, 최소한의 호의가 깃든 유한 음성이 L의 잇새로 흘러나왔다. A은 고개를 돌려 객실에 들어온 L를 잠시간 말없이 응시했다. 지극히 관조적인 시선이었다. 몇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찰나였지만, L는 A이 자신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A의 본심이야 어찌 되었든 말이다. 아무런 기복 없는 저 평온한 표정이 그랬다. 고요하다 못해 담담한 시선은 자신이 지켜오던 침묵을 훼방 놓아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이상한 녀석. 인사가 뭐 그리 힘든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L의 혈색 도는 뺨에는 옅게 홍조가 떠올랐다. L의 벌어진 하순을 타고 재차 성음이 나오기 전, A이 굳게 다물고 있던 순을 열어 답했다.
“안녕.”
제 외관만큼이나 정갈한 음성이었다. 제게 제공된 만큼의 답만을 내뱉은 입술은 곧 원상태를 유지하기라도 하듯, 자신이 내보인 틈을 막아 부드러이 다물렸다. L는 제게 대답을 한 A이 의외였는지 고개가 미세하게 기울었다. 물론 A이 앉은 좌석의 맞은편에 착석하느라 상체가 기울었던 탓에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L는 만면에 호의를 표했다. 별다른 의사는 없었으나, 자연스레 표현되는 것뿐이었다. L의 시선은 A의 발끝에서부터 그 위로 자연스레 올라섰다. 고급 양복점의 재단사가 섬세히 디자인한 듯한 하의가 A의 발목을 타고서 미량 올라가 있었다. 다리를 꼬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셔츠는 바지 안으로 곱게 접혀 들어가 있었고, 막 다린 듯 구김도 별로 없었다.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입매는 창백한 피부에 걸맞게 옅은 색을 띠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사체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눈가에 찍힌 점마저 창에 비춰 볼 때보다 선명해 그가 돌덩이가 아닌 인간임을 유일하게 증명하는 듯했다.
“다른 방은 꽉 차서. 앉아도 되지?”
이미 자신의 맞은편 소파에 앉은 L를 바라보던 A은 그 짧은 두 문장에 L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능글맞네. 대화는 별로 내키지 않는데. 조용하게 가기엔 틀린 것 같군. L가 들어설 때부터 진즉에 이렇게 될 건 알았지만, 영 내키지는 않았다. 이미 자리에 앉아놓고서 뒤늦게 의사를 묻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지 않나. 먼저 객실을 차지한 입장으로서 A이 그에게 괜찮지 않다, 라는 의사를 표할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에 순서는 지키는 것이 매너였다. 그걸 일일이 알려줄 당위성은 없었기에 A은 L를 향해 곧게 향하던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의 시야 끝자락에서 보슬보슬한 금발이 넘실거렸다. 곧 열차가 출발할 시간이었다. 문을 지탱하던 이가 자리에 앉으니 열렸던 문이 자연스레 닫히기 시작했다. 미풍은 아쉬운 듯 A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레 한 번 휙 들추며 잦아들었다.
“그래.”
L는 이쯤에서 그와 자신 사이에 비슷한 점 한 가지를 도출해내었다. 바로 타인에게 무심하단 점이었다. 물론 비슷하다고 해도 표출하는 방향성마저 정반대라, 이조차 들어맞지 않았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어도 매사 웃음 정도는 지어주는 자신과는 달리 무정함이 시선에 그대로 실리는 게, …정말 대단한 인물 납셨네. L의 입가에 미소가 실렸다. 싫은 것과 거슬리는 것 사이에는 극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자신의 감정과 시간을 쏟아부을 정도로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일이 L와 A의 인생사엔 여태 없었다. 그 정도로 자신을 투자할 가치가 없었다는 게 옳겠다. 그렇기에 아직까진, 서로에게 있어 단순히 상성이 좋지 않다, 에서 지나칠 수 있는 가벼운 거리낌만이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 씨처럼 좁은 객실 안을 나부끼고 있었다.
“오늘 날씨 참 좋지 않아? 놀러 가기 딱 좋은 날이네-.”
“…그렇네.”
말이라도 틀까 하면 아예 무시하는 것도 아닌 대답이 길지 않은 간극을 두고 흘러나왔다. L는 그런 A을 잠시간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학교에 도착하려면 길고도 긴 시간이 남은 터였다. 구태여 급히 다가가지 않아도 되었다. 기차의 기적소리가 역사를 가득 메웠다. 귓등을 울리는 증기의 압력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고 두어 번 힘차게 울렸다. 둘은 어느덧 밖을 내다보며 저들에게로 손을 흔드는 인파를 바라보고 있었다. A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들의 수많은 감정이 1초도 되지 않는 찰나에 모조리 휩쓸려 지나간다고 느꼈다. 보이지 않는 파도의 밀물과 썰물처럼, 상대적인 속도 차이에 불과했지만, 보고 있으면 쾌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시선은 열차가 역을 완전히 나설 동안만이라도 쉬려는 듯 객실 안으로 돌아섰다. L는 저와 맞닿은 시선에 다시금 대화를 이끌어보았다.
“이렇게 만난 것도 운명인데, 이름이 뭐야? 난 L야. L.R.C.”
“A.L.R”
“응, A. 우리 앞으로 잘 지내보자.”
제멋대로 애칭을 정해버린 L는 A이 저와 악수해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손을 내밀었다. 부드러운 굴곡을 그린 눈매에 걸맞게 끝이 내려간 눈썹. 채도 낮은 금발은 언뜻 보면 추분을 맞이한 밀밭과도 같았다. A은 제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가만히 펼쳐두고서, 단지 따스한 온기를 머금어 뻗은 L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시선은 재차 느릿하게 L의 눈가로 와 닿았다. 타의 외피를 벗겨 만들어낸 칠흑의 장갑이 톡, A의 무릎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불필요한 행동이었으나, 고민의 여지였다. 시끄럽고, 탈도 많고. 친한 척은 왜 이렇게 심한 건지. A은 몇 번이고 제 의사를 고려하지 않은 언행은 거치적거렸다. 예를 차린다면, 악수에 응해주는 게 맞았지만.
“악수례는 생략할까.”
“뭐…, 그래.”
L는 그의 대답에 흔쾌히 알았다는 듯 내밀었던 손을 내렸다. 거절당해도 쉽사리 내려가지 않는 저 입꼬리가 A은 묘하게 거슬렸다.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면 일부러 저러는 게 분명했다. 자존감이 높아 이런 건 아무렇지 않은 건가. L에게 상처를 주고자 하는 의도도 없었고, 하물며 L가 제 거절에 상처받았다고 하더라도 어루만져줄 생각은 없었음에 A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어느덧 역사를 빠져나온 열차에 모로 밝은 햇발이 쏟아져 내렸다. 둘은 눈가를 때리는 발간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잠시간 응시하기만 했다. 정말 안 맞네. 어쩌면 오늘 하루 동안 지내게 될 학교생활에서 둘이 유일하게 잘 들어맞았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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