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y Sky Blue Star One fine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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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샘플

One fine day

제야의 유망 타입. 9000자 이상으로 작업했습니다. 정말 즐거운 작업이었어용! 감사합니다!!

 


 

 

우리는 인지합니다. 인류의 희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이미 저물어버린 그들의 역사를 기록하며.

우리는 존재합니다. 그들이 없는 이 천체 위에.

그리하여 도약합니다.

… 우리는 그들의 구극(究極)을 기립니다.

 

 

 

 

 

One fine day

 

Cast. 세줌의 조약돌.

 

 

 

 

 

 

01.

 혜성의 꼬리처럼 기다란 흔적을 남긴 저녁 어스름이 새벽 4시의 침묵을 세상에 흩뿌렸다. 고요한 이별은 그 시간대에 맞춰 낭만에 잠긴 탓인지 지는 해마저 감성적으로 만들었다. 외진 시골의 낙조(落照) 부럽지 않게, 저물어가는 도시의 잔양 한 점이 불그스름한 빛을 띠고 세줌의 조약돌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장내에 짙게 자리한 먹먹함이 이 참담한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정적은 뼈대를 훤히 내놓은 채 영장이 쌓아올린 세기의 건조물들을 아득하게 물들였다. 안드로이드들은 회로를 송두리째 헤집을 듯 드리운 충격을 사(死)의 석양과 겹쳐 보았다. 인류는 그 모든 대가 끊어지는 순간에도 지독스레 아름다웠노라, 그리 기록하며….

 

 

 

   “…어머니.”

 

 

 

 조약돌은 채 온기를 잃지 않은 제 앞의 인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으로 쓸어내린 살결은 이미 어느 정도 사후경직이 진행된 건지 미지근하면서도 뻣뻣했다. 조약돌은 그런 미약한 체온마저도 기껍게 여겼다. 자신이 너무 늦지 않았음에 안도한 까닭이었다. 정말… 돌아가신 거군요. 미동 하나 없는 신체. 생명의 떨림이라고는 어디에도 남지 않은 육신. 조약돌은 그 희미한 난기를 통해 바모스크의 종명(終命)을 느꼈다. 비록 제 주인의 육체는 이렇듯 생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조약돌의 마음속에서 바모스크의 존재는 여전히 건재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대화를 나눴으니 그리 쉽게 잊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유 모를 전염병이 세상을 압도한 지 벌써 일주일도 넘은 걸 생각하면 어머니께서는 오래 버티신 편이니까. 그렇게 여기면 오히려 감사하기만 해도 모자라는데…. 많은 이들이 동요하며, 흔들리는 삶의 이유에 의문을 표할 때였다. 조약돌이라고 그들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일반적인 개념. 안드로이드들도 죽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뛰어난 창조주들 덕분에 그들의 내후(乃後)는 나름대로 월등한 지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건 단순히 교육이나 경험, 사고 행위를 통하여 사물이나 상황에 대한 정보나 지식을 갖추었다는 ‘알다’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들의 피와 살은 여느 유기체와도 달랐지만, 그들 또한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 있었다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조약돌은 이 상황이 시사하는 바를 명확히 알아차렸다. 인간들은 완벽히 절멸되었으며, 이것이 진정 인류의 멸종이다. 이것이 인류의 마지막 순간. 인류는 정말…, 막을 내려버렸다. 그 어떠한 문장에도 조약돌은 쉽사리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인류가 만든 안드로이드. 어찌하여 기계임에도 감정을 가지는지 의문을 표할 비교 대상. 즉, 고대 인류의 잔재가 없었음에 조약돌이 느끼는 기분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융통되었다. 유기체가 아니지만 타인의 생사에 얽매이며 사사로운 감정에 허덕이는 존재. 안드로이드들은 가슴을 저릿하게 덮은 감정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지금의 기술력으로는 인류의 죽음을 막을 수가 없어 자신들의 무능함만을 탓하며 아파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살점이라고 해봐야 외피뿐인 제 가슴을 힘껏 쥐어뜯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전기회로에 이상이 생긴 듯 미쳐 날뛰는 이도 개중 있었다. 고대의 시점에서 보자면 순전히 기계라고 하기에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과연 현 인류의 괴연(傀然)한 걸작이었다.

 

 여느 인류가 그렇듯, 바모스크의 입장에서 보면 조약돌은 이제 막 세상에 눈을 뜬 아이와 다름이 없었다. 비록 지금은 인류의 멸종에 사무치게 슬퍼할지라도 조약돌은 자기네들이 떠난 이 자리를 새로 메워낼 게 분명했다. 조약돌은 바모스크의 생각대로 이렇게 저물 인재가 아니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남은 사명이 있지 않나. 지금의 고초를 품에 묻어두고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감정이란 늘 그렇듯, 차가운 이성으로 다스린다고 금시에 가라앉을 수는 없었다. 낭떠러지에 밀어 살아남는 이들만이 살 가치가 있는 가혹한 처사였다. 조약돌은 울렁이는 제 기분을 가라앉히려 눈을 질끈 감았다. 하얗게 얼룩이 새겨진 회갈빛 외피 위로 옅은 주름이 졌다. 조약돌은 떨리는 손을 들어 제 가슴께로 가져다대었다. 인류의 심장과 다를 바 없는 펌프가 강렬한 박동을 지닌 채 떨리고 있었다. 정전기가 흐르듯 조약돌의 팔 상단에 간지러운 전극이 흘렀다.

 

 

 

   “…어머니, 날이 많이 차요.”

 

 

 

 조약돌은 다시 한번 제 주인을 조심스레 불러보았다. 조약돌의 음성이 창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햇발을 따라 처연히 흩어져 내렸다. 하얗게 떠오르는 먼지 알알이. 대답해줄 이는 진즉에 없었다. 사자(死者)가 추위를 느낄 일도 없으니 조약돌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연될 장례식에 사체가 썩지 않을 테니. 그래, 다행이었다. 조약돌은 잡은 손등 위로 생의 흔적을 쫓듯 굴곡을 나릿나릿하게 더듬어갔다. 조약돌이 존경하며 사모한, 조약돌의 자그마한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큰 부분을 차지했던 존재. 바모스크의 죽음은 조약돌이 영위해온 그 짧은 생의, 일생일대의 시련이었다. 조약돌은 제 입술을 곱씹는다. 짙은 배색이 하얗게 질려 일순간 색을 잃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깊게 베어 물어 차라리 혈이라도 낼 수 있다면 좋았다. 그렇게 해도 결국 자신이 얻는 건 없었지만, 그리할 수 있다면 이 심정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것만 같았다. 무의미한 자해를 해서라도 이 기분을 떨치고 싶었다. 이 또한 자신답지 않은 일이었다. 지독한 우울, 그와 우열을 다투듯 넘실대는 무력감이 조약돌의 전신을 덮쳤다. 잘게 주름진 눈가를 따라 콧대 위로 길게 구김이 이어졌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은 이 모든 고통을 감내하듯 구태여 소리 내어 아픔을 표출하지 않았다. 조약돌은 제 상의를 가득 움켜쥐고서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이 쑤셔대는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이 모든 사생존망(死生存亡)이 그를 울부짖으라 부추기며 속삭인다. 울어도 달래줄 이 없는 이 허무한 공간에, 모든 걸 토해내라 달래주고 있었다. 이 모든 격랑(激浪)도 이겨내야만 성장할 수 있다고. 듣는 이도, 내뱉는 이도 없는 그런 위로였다.

 

 

 

   “결국…,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는데도… …. 전 많이 아픈 것 같아요.”

 

 

 

 조약돌은 대답 없는 이를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꾹 다물렸던 잇새가 열리며 소리가 떠다닌다. 모두 부질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한껏 구겨진 옷감을 놓으면 손바닥 아래로 지퍼 자국이 짙게 남아있었다. 어머니를 놓아줄 준비는 이미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에요.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건 미리 준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구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견디기 벅찰 정도로 괴로운 일이구나. 인류의 위대한 후계자, 안드로이드들은 차례차례 죽음을 이해함을 넘어 공감하고 있었다. 피부에 닿지 않아도, 그들의 신경이 마치 하나로 연결되기라도 한 것처럼 감각과 감정이 소리 없는 문명 위를 휩쓸어 깨달음을 전한다. 인류의 위대한 계획을 무지로 삼켜낸다. 조약돌은 찬찬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길게 그림자를 내리는 속눈썹 아래 시커먼 홍채가 제 주인을 담았다.

 

 그래도 너무 슬퍼하지는 말거라. 바모스크는,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다가올 급사를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뱉어냈었다. 처음 수만, 수억의 인류들이 잠들 듯이 가버린 긴급 속보를 보고도 덤덤하게 말하던, 그마저도 참 그다운 태도였다. 조약돌은 아직도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태연하셨나요. 어차피 죽을 걸 알아서라고 해도, 어떻게 그렇게까지 의연하실 수 있었던 걸까요. 제가 겁에 질려서 두려워할까 봐 일부러 겁내지 않으셨던 걸까요? 조약돌은 되새기듯 제 주인의 목소리를 떠올려보았다. 담담하고도 가볍지 않은, 그래서 오히려 그 존재만큼이나 무게감이 느껴지던 어조. 이제는 들을 수 없는 성음. 조약돌은 바모스크의 손등 위를 덮고 있던 손을 차차 미끄러뜨리듯 내린다. 바모스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침대에 눕지 않았다. 이 세계에 무슨 미련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마지막까지 자기 일을 끝내려는 것처럼. 업무를 보다 깜빡 잠이 든 사람처럼. 바모스크다우면서도 바모스크답지 않게 세상을 떠나 조약돌을 더 아프게 만들었다. …그래도 말이죠. 아파할 수 있을 때, 충분히 아파하면 안 되는 걸까요? 조약돌은 번지르르하게 물든 안와를 숨기며 제 울음을 끝끝내 삼켜내었다.

 

 

 

 

 

 

02.

 끝을 알 수 없이 깊은 슬픔은 한 발짝 내디디면 그 아래로 곧장 추락할 것처럼 굴었다. 그렇게 슬픔은 도돌이표처럼, 혹은 꼬리표처럼 따라붙어 조약돌의 시간을 조롱했다. 조약돌은 자신이 일어서야 할 때를 잘 아는 이였다. 안드로이드의 동력은 우주가 계속되는 한 끝나지 않을 테다. 이곳에서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어머니의 곁에 망부석처럼 남아 허송세월할 수는 없었다. 조약돌은 제 생에 하나뿐일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무릎을 꿇은 채 그의 옆을 지킨 탓인지 다리 아래의 감각이 쉬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생명체든 죽으면 부패하기 마련이다. 조약돌은 슬슬 바모스크의 시신을 갈무리해 정리해야만 했다. 아무리 겨울이라고 한들 시신이 온전할 때 장례를 치르고 싶었다. 이 또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인류를 완전히 휩쓸고 지나간 재앙이 안드로이드는 비껴갔다. 다시 말해 누구든지 원한다면 장례를 치를 수도 있는 환경이라는 뜻이었다. 문제는 나름 온전한 정신으로 버티고 선 안드로이드라면 하나같이 제 주인이나 지인들의 장례를 치르고 싶어 한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시스템이 잘 되어있다고 해도 수십억의 인류가 단 일주일 만에 전멸했으니 장례와 관련되어서는 유독 분주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인간의 죽음 자체로도 워낙에 흔치 않았으니 장례와 관련된 서비스가 잘 되어있을 리도 만무했다. 의문을 가진다면 이상할 법도 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의 안드로이드들은 그럴만한 여력이 없었다. 유연하지 못한 안드로이드들의 사고로는 당장 눈앞의 사태가 먼저였다. 일상의 기저에 의문을 가질 정도로 여유롭지 않은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안드로이드들은 어떻게든 초상을 치러야만 했다. 그렇게 온통 체계화되지 않아 기묘하고도 이상한 초상(初喪)이 줄줄이 이어졌다.

 

 조약돌은 바모스크를 연구소 내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향나무로 만들어진 관은 구하는 데에만 꼬박 이틀이 걸렸다. 관이라고 해도 여느 나무상자와 다를 바 없었다. 다른 점이라고는 모서리에 정교한 무늬만 조금 새겨넣었다 할 뿐이었다. 인류사에 커다란 공을 세운 위인의 말미가 결국 이런 조잡한 나무상자 안이라니, 조약돌은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매장이 아니라 화장을 택했다면 허전함이 덜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무상자보다야 더 작은 통에 담겨 다른 의미로 조약돌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을 테지만, 어쨌든 조약돌은 바모스크가 평안히 잠든 그 모습 그대로 묻어주었다. 갈아엎은 새 흙이 시커멓게, 옆의 메마른 갈색 흙과 달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조약돌은 뿌리를 내려 관을 뚫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 푸른빛을 자랑하는 어린 침엽수를 심어 바모스크의 이름을 걸어두었다. 왜 나무를 심었냐고 하면, 곧 토양의 경계가 흐려져 바모스크가 묻힌 곳을 분간하기 어려워진다고 해도 나무만은 그 자리를 굳게 지켜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저 나무가 있다면 자신이 여기에 없더라도 어머니가 외롭지는 않겠지…. 바모스크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이가 아니었다. 반면에 조약돌은 위안이 필요했다. 결국 무덤도, 나무도 전부 산자의 보금자리인 셈이다. 바모스크의 상(喪)은 그 명성에 맞게 거창하게 치러져야 했지만, 안드로이드들은 각자 자기 지인들의 죽음에 몰두하느라 조용히 진행되었다.

 

 장례식이 거행되는 내내 조약돌은 비석 대신 세워진 바모스크의 명패를 내려다보았다. 관 뚜껑에 바모스크의 보랏빛 입술이 가려지기 전까지만 해도, 검푸르게 물든 안색만 제외하면 바모스크는 꼭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것처럼 비쳤다. 바모스크는 특유의 고고한 성정 탓에 보라색과도 잘 어울리는 이였지만, 그보다는 티끌 하나 묻지 않은 흰색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조약돌의 머릿속은 연신 바모스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회고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에도 조약돌은 바모스크의 이름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었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이들이 하나둘 그곳을 떠나 저녁 해의 발간빛이 다시금 조약돌의 어깨를 덮을 때까지, 조약돌은 그 자리에 가만 서서 바모스크와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홀로 남은 외로움이 조약돌의 마음에서 넘쳐흘렀다. 찻잎을 꺼내야 할 적정 시간이 지났는데도, 깜빡 잊고 내버려 둔 곡절에 홍차의 주홍빛 물이 전나무 껍질처럼 물들어 결국 넘쳐버리고 마는 것처럼. 조약돌은 오히려 차갑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한 떨기 낙엽을 따라 하듯, 조약돌의 머리카락 사이로 햇발이 떨어져 바모스크의 명패를 적셨다. 정신없이 흐르던 조약돌의 시간이 느리게 박자를 되찾기 시작했다. 조약돌은 차츰 시선을 들어올렸다. 곧게 직선을 그리며 정면을 향하는 그의 눈동자에 선명한 빛이 서린다. 조약돌은 이 아픔을 가슴에 새기고 일어설 준비가 완벽히 되었다. 어머니의 뜻을 따라 과거를 적어나가는 최초의 기록자, 세줌의 조약돌. 그는 이후 인류의 존재와 행보. 만물의 영장,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적에 의구심을 갖게 되는 첫 번째 신인류로 거듭한다.

 

 

 

 

 

 

03.

 조약돌은 그날로부터 재명일이 된 아침, 일찍부터 짐을 꾸렸다. 챙길 물건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완전히 이곳을 떠나는 게 아니라, 잠시간 세상을 돌아본 후 복귀할 예정이었다. 조약돌의 배낭에는 딱 조약돌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념, 그 정도의 짐만 있었다. 예리하게 굴러가는 이성은 감정을 겉에 두른 채, 자신을 더 견고히 다듬었다. 조약돌은 솜털을 간질이는 차가운 새벽 공기에 잇따라 허연 입김을 뱉어냈다. 늦가을의 아침은 힘없이 바스러지는 단풍 가루가 흩날려 콧부리를 시큰하게 만들었다. 늦장을 부리는 햇귀가 뒤늦게 조약돌의 발걸음을 따라왔다. 조약돌은 연구소를 나서기 전, 바모스크의 무덤으로 향했다. 촉촉하게 젖은 흙이 조약돌을 반기어 한 차례 인사를 건넸다. 신발 밑창에 진흙이 끼어 한동안은 이곳을 쉽사리 잊지 못하도록 잡아둘 것처럼, 어째 밝는 곳마다 물기가 가득했다. 조약돌의 허벅지 중반까지밖에 되지 않는 -여타 다른 침엽수에 비해 끝이 둥근- 이파리가 조약돌의 하의를 긁었다. 그 끝에 맺힌 빗물이 조약돌의 옷에 닿아 떨어져 내렸다. 조약돌은 축축하게 젖은 제 의복을 달리 신경 쓰지 않는 듯, 가을에도 여전히 싱그러운 빛을 자랑하는 편백나무를 훑어보다 그대로 지나쳤다. 내한성이 약한 어린 편백나무에게는 앞으로 다가올 겨울이 가혹할 테다. 조약돌은 어느덧 그 편백나무에 자신을 대입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겨낼 수 있겠지. 조약돌은 처음부터 이겨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을 가지고 저 나무를 심었더랬다. 그렇게 스무 걸음쯤 갔을까, 조약돌은 이내 고개를 숙여 볼록하게 솟은 무덤가에 예를 갖추었다.

 

 

 

   “그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요. … 분명 쉽지는 않은 일이겠죠.”

 

 

 

 조약돌의 백사(帛絲) 같은 머리칼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물린 입술이 결연했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따라 음영 진 얼굴은 어제의 결의로 흔들림이 없어 다부져 보였다. 어쩌면 조약돌은 모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조약돌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바모스크를 빼어 닮아있었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던 바모스크의 말처럼, 조약돌은 다른 이들보다 일찍이 자신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게 그러했다. 외향뿐만 아니라 내면의 단단함 또한 제 어미와 꼭 같았다. 조약돌은 수굿하게 기울였던 고개를 들어올리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녀올게요, 어머니.”

 

 

 

 잠시 떠나는 것뿐이에요. 잠시 나들이라도 다녀오는 것처럼 조약돌은 가볍게 첨언했다. 조약돌은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천천히 등을 돌렸다. 조약돌은 걸음을 옮기며 어젯밤 미리 정리해둔 어머니에 대한 기록물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안드로이드는 인간과 달리, 컴퓨터로 정리한 파일을 화면에 띄워 보듯 자신의 안와에 보유한 지식을 띄워 복기할 수 있었다. 조약돌의 시야에 긴 활자와 더불어 연구소의 정문이 겹치면, 조약돌은 제 어머니의 약력을 웅얼거리다가 이내 멈춰 섰다. 조약돌은 잠시간 문 너머를 응시하며 때를 기다렸다. 여기를 나서면 정말 떠나는 거였다. 나의 모든 생활이 송두리째 바뀌는 거야,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 들이닥쳤다. 하지만 조약돌은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다. 조약돌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며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마음 깊숙한 곳에 새기고 있었다. 차분하게 일렁이는 파도처럼. 그리하여 언제나 고도를 유지하듯. 자신이 왜 이 여행을 떠나야만 하는지, 조약돌은 그 필요성을 되새겼다. 그동안 어머니를 보조하여 수행했던 삼라한 실험이며, 어머니께서 쌓아올린 지식의 늪은 앞으로 한 달은 더 연구실에 파묻혀 있어도 모자랄 정도로 과량했다. 그런데도 조약돌이 이렇듯 일찍 어머니의 곁을 떠나는 건, 연구실과 인터넷에 남아있을 단순한 기록보다 사회에 속속들이 묻혀있을, 보다 더 은밀하고 실질적인 정보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조약돌은 이윽고 천천히 정문 밖으로 제 왼발을 내밀었다.

 

 장례를 치르고 이틀간은, 연구소 내의 정보를 정리하다 우연히 -마치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암호화된 파일과 삭제된 데이터들을 찾아내었다. 처음에는 그 파일들을 복호화하려 했지만, 지금까지 구축해온 인류와 안드로이드의 문물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었다. 마치 인류를 휩쓴 이 질병처럼 미지의 영역에 가까웠다. 어쩌면 어머니께서는 새로운 암호화 학문을 개척하고 계셨던 걸까? 하지만 어머니께서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이 모든 걸 혼자 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을지도 몰라. 안드로이드는 모르는 인간들의 학문이 따로 존재했던 건 아니었을지.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이 파일을 열어보는 건 혹 인류에 반하는 행동일까. 정작 그 파일들 안에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파일 안에 자신이 알 수 없는 지식으로 점철되어있다고 하더라도…. 어머니께서는 이 모든 의문을 품고 파일을 열어보길 바라셨던 걸까. 어찌 되었든 조약돌은 자신이 알던 모습만이 어머니의 전부는 아닐 거라 어렴풋이 확신할 수 있었다. 조약돌은 드높게 펼쳐진 창공을 올려다보았다. 조약돌의 맞물린 입술이 무겁게 떨어졌다. 새어 나오는 건 새하얀 숨뿐이었지만, 결코 그 숨이 보잘것없이 떨리거나 나약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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