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y Sky Blue Star And The Time Sto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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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샘플

And The Time Stops

그들의 제야로 작업했습니다. 감사합니다! o((>ω< ))o


 

 

 

 

And The Time Stops

 

P. Z & E. Y. J

 

 

 

 

 

 

 

 

 

00. PM 05:48

 

자연은 매번 시선을 둘 적마다 시시각각 변모한다. 흐린 날의 하늘은 덩어리진 구름이 잿빛으로 세상을 덮었고, 건조하게 메마른 땅은 황갈색으로 음영 진 부분이 거무스름했다. 비 내린 후의 티 하나 없이 맑은 창공은 파스텔 블루로 채도를 낮추어 새로 단장했으며, 상천(上天)의 탁수를 모조리 받아낸 대지는 그를 대신하듯 응달이 스몄다. E의 머리색은 갈색 중에서도 유독 연하고 가는 편이었다. 햇발이 스칠 때면 제게서 멀어지듯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흩어져 내리는 게 꼭 그랬다. 그런 E의 머리카락이 물에 젖을 때면 색이 짙어져 저들끼리 뭉치곤 했다. 이렇듯 젖는다는 건 똑같은데 변하는 색은 다채로웠다. 은색 물비늘이 번들거렸다. 해안가의 밀물은 에메랄드…. 황혼의 바다는 붉고. 당신의 빛깔이 물결을 따라 대양으로 퍼졌다.

 

 

 

 

 

 

01. PM 05:49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밖으로 나가는 게 어려운 사정이라는 건, 전에 있던 연구실을 탈출할 적부터 알고 있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옷감에 걸린 유리 조각이 때 마침 실밥을 찢고 떨어져 나왔다. 제가 가는 곳마다 따라붙어 물 먹은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파편들이 당신의 발치에도 자리하고 있었다. 토끼 눈이 되어 제 손목을 잡고 몸부터 숨긴 당신이 제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P. Z, 지금부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마. 궁금해도, 이상해도. 알았어? 사랑하고 있다는 조촐한 고백에 대한 답변으로는 참 이상하기만 한 말이었다. 벙긋거리려던 찰나, 따뜻한 온기가 입술 위를 덮었다. 내뱉는 숨결이 당신의 손바닥 아래에서 되돌아와 생경하고도 이질적이었다. 손목을 그러쥔 손이 제 것보다 한참이나 작았다. 제게 닿은 모든 체온이 유리벽 너머로 건너보던 당신의 일부라는 사실만으로 -당신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영문을 모르겠지만.- 감출 새도 없이 입꼬리가 올랐다. 손등에 가려졌으니 제 표정을 보지는 못하려나. 자신의 확신은 당신의 손짓을 물증으로 삼고 한층 견고해졌다. 저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그러니 낯선 이들이 잔뜩 모여 있는 지상철을 타고 어디론가 간다는 건 오늘이 그만큼 특별한 날이라는 뜻이었다. 이곳으로 처음 이사 왔을 때를 제외하곤, 지상철을 본 일이 초유(初有)했기 때문도 있었다. E는 누군가 우리를 염탐할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자신에게 별다른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그간 봐왔던 E와는 어딘가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기에 짐작할 수 있었다. 생명체의 시선이나, 음성. 이상한 낌새는 자신이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으니 E는 너무 걱정할 필요 없을 텐데. 무슨 일 있냐며 E에게 자신이 느끼는 바를 말해보아도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어쩌면 신체적인 능력은 출중하더라도 생활적인 실지에는 무지한 자신이 미덥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E가 자신에게 비치는 떨떠름한 표정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느덧 E와 함께 지낸 지 몇 개월이 지난 지금에서 보자면 E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신은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E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알려줘야만 인간답게 굴 수 있었다. E와 살아가려면 인간답게 행동해야 했다. 배우는 과정은 험난했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자신이 E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리라는 걸 E는 잘 알고 있으니까. 당신이 날 믿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당신은 이렇게 숨죽이고 조용히 사는 게 우리에게 이롭다고 했다.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았지만, 구태여 길게 토를 달지도 않았다. 왜냐고 물었던 날, E는 복잡미묘한 기류를 표출했다.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 건지 가늠하는 듯했다. 아니, 어디까지 말해야 자신이 이해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E와 함께하며 눈치라는 걸 키웠다. 딱히 키울 필요가 없던 능력이었지만, E와 함께하다 보니 자연스레 기르게 되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려면 어느 정도 상대를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고 E가 그랬다. E 말이 옳아요. 설명하기 힘든 일이라면 꼭 듣지 않아도 좋았다. E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은 이미 만족하고 있었다. 자신의 호기심과 궁금증은 전부 당신에게서 비롯한 것이었으므로, 가끔은 당신을 위해 자신의 의구심을 자제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E가 가르쳐준 행복으로, 그 존재만으로 제 세상은 다채롭게 물들었다. 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도, 자신을 살게 하는 이유도. 처음 눈을 뜬 순간부터 온 세상이 당신으로 가득했다. 당신이 제게는 하나뿐인 진리였다. 인간을 온전히 공감할 수 없는 한계가 뒤따랐지만, 해답을 알 수 없이 뭉뚱그려 의문으로 가득 찬 생활에도 크게 투정 부릴 이유가 없었다. 당신이 하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 맹목적인 믿음이었다. 때로는 당신을 향한 신뢰와 충실함이 도리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 때도 있었다. 물어보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의 걱정거리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제게는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었다. 당신이 고민에 잠긴 듯 미간을 찌푸리거나 이해할 수 없을 복합적인 감정을 참아낼 때면 간혹 당신을 도와주지 못하는 제 쓸모에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E의 곁에서 E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을 하나둘씩 찾아가고 배워나갔지만, E는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드러내는 걸 내켜하지 않았다. E의 눈에 담기는 감정이 기쁨에서 근심으로, 의문에서 안도감으로. 경계를 흐리지 않게 선명하다가도 물길에 휩쓸리듯 모든 게 섞여 들었다. E는 태풍의 눈과도 같았다. 고요하고도 혼잡스럽다. E의 눈동자를 통해 바라보는 세계는 조용하고도 난잡했다. E를 주변으로 모든 게 존재하는 제 세계도 E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저는 E를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자신은 E만 있으면 되었지만, E는 제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축축하게 젖은 천이 다리를 휘감았다. 발목을 타고 쓸려온 모래알이 살갗을 긁어댄다. E는 알았나요? E 없이 자신이 살아갈 경우도 염두에 두고 있었나요? 뒤늦게 답을 갈구하듯 품에 안은 당신을 제 허리춤으로 당겨보아도 당신은 밀려가는 물길에 팔을 흔들기만 했다. 암갈색의 머리카락이 이는 너울에 촘촘히 흩날렸다. 제 손가락을 타고, 손가락을 피해 달아났다. 단정하게 직선을 그었던 입매가 차차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왜 그랬던 거예요?”

 

 

 

한탄 어린 음성이 줄줄이 묵혀둔 감정을 토해냈다. 당신이 걱정을 덜어낼 수 있도록 좀 더 집요하게 물었어야 했을까. 당신의 대답을 듣지 않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까? 스스로를 향한 후회와 미량의 역정이 육풍에 실려 왔다. 당신을 원망하고 싶었다. 그 이전에 당신은 왜 제게 좀 더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이유였다. 결국 당신의 대답을 기피했던 건, 당신의 고뇌에 대해 알아주지 않은 건 당신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당신을 감한하고자 했던 순간의 여념은 금세 사그라졌다. 제 이치이자 명제인 E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때로는 당신이 제게 알려주던 잡다한 일상들이 성가시기도 하고 번거롭기도 했지만, 당신이 제게 알려준다는 자체만으로, 당신이 제게 베풀어주는 행위라 따를 수 있었다. 자신이 하나씩 알아갈 때면 간혹 비 내린 후, 맑게 갠 하늘처럼 빛을 띤 눈동자에 기쁨이 담기곤 했으니까. 저는 다시금 확신한다. …당신이 옳아요. 당신의 선택이 옳아요. E, 당신이 어떤 선택을 했든 당신이 옳아요. 이를 악물고는 터져 나오는 숨을 삼켜내었다. 가해진 힘에 턱을 따라 근육이 불거졌다. 죄의 화살은 반 바퀴 돌아 역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애초에 당신을 지켜내지 못한 자기 잘못이었다. 저는 당신이 만들어낸 창조물인데. 당신은 마지막 순간,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제게 실망했을까? 가슴 한가운데가 파헤쳐진 듯 텅 빈 느낌이 들어 당신을 더 세게 껴안았다. 맞닿은 감촉을 통해 어떻게 해서는 그 틈새를 메꾸려 했다. 팔을 타고 찌뿌드드한 소름이 기어오른다. 제 죄악이 소금기를 띄어 결정으로 거듭났다. 모래알일지, 소금일지. 바닷물이 굳으면 소금이 된다고 했는데. 이게 무엇이든 옷감이 살갗을 문지를 적마다 그날의 깨뜨린 유리 조각처럼 뭉근히 배겼다. 손등에 송골송골하게 맺힌 방울이 철썩이는 물살에 쓸려가고 있었다. 앞으로 다시는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사과를 입 밖으로 겨우 내뱉어 보았다. 연정이란 이름의 용서를 구한다.

 

 

 

   “…정말 미안해요, E. 미안해요….”

 

 

 

 

 

 

02. PM 02:37

 

한바탕 폭우가 쏟아 내렸다. 잔잔한 수면을 일깨우듯 처음에는 자잘하게 떨어지던 빗방울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거세게 나부끼기 시작했다. 우비를 입은 Z의 모습은 이곳으로 오던 날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후드를 꾹 눌러써 눈조차 보이지 않았던 행색. 일상복을 입은 Z는 언뜻 인간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괴리감이 들었다. Z가 마음만 먹는다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고도 남겠지. 잇새로 흩어지는 입김에 차창이 흐려져 뿌옇게 번졌다. 버석하게 떨어지는 구순을 비집고 비린 맛이 났다. 본능적으로 혀를 내어 핥아 보면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입술이 갈라진 모양이었다.

 

 

 

   “E. 피가 나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돌리면, 하얀 머리가 바로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정신없이 몰려든 인파에 지상철을 관리하는 이들도 인원 점검을 제대로 하기에는 벅찼던 탓에 이번엔 한결 쉽게 탑승할 수 있었다. 모자 아래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눌려 Z의 눈꺼풀을 간질이고 있었다. 때맞춰 지상철에 올랐으니 이제는 한숨 놓아도 좋았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놀러 가자고 탄 지상철이 아니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Z의 위조 신분증을 매만진다. 대답은 한 박자 늦게 흘러나왔다. 손을 들어 생채기 언저리를 더듬으면 혈이 묻어나 영 찝찝했다.

 

 

 

   “…아, 고마워.”

 

 

 

진심이기는 했으나 어딘가 얼빠진 답변이었다. 신경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주변을 향했다가도 곧 대지를 가를 듯 내리치는 번개에 뺏기기 일쑤였다. 습격당하기 전에 일찍이 빠져나왔다고는 해도, 지상철이 네온시티의 외부에 있으니 운이 좋지 않다면 피난길에 기습당할 수도 있었다. 자신이 고민한다고 춘사(椿事)가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설상가상으로 겹친 상황만 해도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에 놓이기에는 족했다. 그러니 입술이 조금 찢어지는 건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한테만 해당하는 일이고, 아직 사회성이 부족한 Z에게는 당장의 상황보다 자신에게 생긴 상처 하나가 더 중요하겠지. 검지와 엄지를 맞대어 문지르면 묻어난 피가 살갗 위로 자취를 감추듯 점차 옅어졌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게 두가 울렸다. 침착하게 생각해야지. 한 번 들러붙은 Z의 시선은 좀처럼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이럴 때는 남의 시선조차 거슬리기 마련이다. Z야 자신이 인지하기 전부터 쳐다봤을 텐데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그만큼 자신이 예민하다는 의미기도 했다. Z가 뭘 안다고, 짜증 내지 마. 걱정하는 것뿐이잖아. 생각은 그렇게 해도 자꾸 미간이 찌푸려졌다.

 

물리적으로라도 미간을 펴려 손을 올렸다. 콧잔등을 향해 펼쳐진 손끝이 순간 허공에서 움츠러들었다.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세게 부여잡지는 않았을 Z가 갑자기 제 어깨를 악력으로 짓눌렀던 탓이었다. 괜찮다고 했는데, 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짜증이 몰아쳐 수굿하게 기울던 고개를 들려던 그 짧은 찰나, 천지를 두 동강 낼 듯 울려 퍼지는 굉음이 귓등을 내리쳤다. 객차가 선로에서 벗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출렁이기 시작했다. 천둥과는 규모부터가 남다른 아우성. 단순한 지진이라고 치기에는 무언가 기묘했다. 어떤 지진이 함성을 내지른단 말인가. 탈선하기 직전인 객실 내 상황은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의자 밑으로 숨거나 머리칼을 움켜쥔 사람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기 위해 몸을 일으킨 사람들까지. 잠시간 넋을 잃은 채 그들을 훑어보다 퍼뜩 고개를 치켜들어 탁한 홍채를 바라보았다. Z는 이미 바깥을 향해 노골적인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창밖을 향한 시선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싸한 장내의 분위기가 천천히 자신을 압도해오고 있었다. 귓불에 점차 열이 올랐다. 심호흡해. 정신 차려. 가슴께에 쇳덩이를 올린 듯 숨 쉬는 게 벅찼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준비해둔 무기가 가슴을 짓눌렀다. 떨리는 입술을 벌리고는 애써 숨을 들이켰다.

 

 

 

   “…Z, 꽉 잡아!”

 

 

 

전신을 타고 흐르는 소름에 오금이 저렸다. 호차 내에 갈라진 음성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채 성량을 조절하지 못해 주위의 이목이 자신에게로 쏠렸다. 어리둥절하던 이들이 제 고함에 사색이 된 채로, 제 몸 하나 건사하게 지탱할 수 있는 구조물을 찾아 더듬어대기 시작했다. 자신 또한 허공을 짚던 손으로 Z의 팔을 붙잡고는 황급히 몸을 낮췄다.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객실 내 라디오가 기이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 크리쳐야. 크리쳐를 피하고자 피난 가는 길이었는데, 역으로 지상철을 덮칠 줄이야. 혹시나 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지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 터졌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벌어져 입 안 가득 비린 맛이 퍼졌다. 뒤로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까마득한 암전이 찾아왔다.

 

 

 

 

 

 

03.

 

규칙적인 미동이 흐린 의식을 파헤친다. 은연중 열차의 미세한 소음이 아닌, 고운 입자가 부드럽게 흩날리는 게 느껴졌다. 자신을 달래듯 귓가에 자리한 심장박동이 안정적이었다. 일반적인 사람과는 달리 무거운 맥동. Z였다. 눈꺼풀을 타고 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린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중력이 무겁기만 하다.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어. 감각은 의식보다 한 발짝 늦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뺨에 닿는 따스한 촉감과 섬유유연제 냄새. 철썩이는 파도 소리. 마지막으로 전신을 두들겨 맞은 듯 엄습하는 통각까지도. 아래로 늘어뜨린 팔을 움직이려 힘을 실으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잇새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E. 정신이 들어요?”

 

 

 

물이라도 미리 마셔둘걸. 완전히 버석하게 말라 끝이 일어나버린 입술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환부와 눈두덩을 씻어내고 싶었다. 뜯어질 듯 맞물린 각질이 저들끼리 달라붙어 새로운 상처를 만들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치명상이겠지. 물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들러붙은 옷이 축축했다. 척추에 이상이라도 생긴 건지 한쪽 다리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는 구조대가 운 좋게 도착한다고 해도 그 전에 이미 사망했을 확률이 살 확률보다 높지 않을까…. 손가락 하나 까딱거리는 것조차 힘겨웠다. 제 죽음이 고작 이런 식이라니, 조금은 억울했다. 열심히 살았는데, 이렇게 죽기엔 너무 허무했다. 혹시 몰라 준비해 둔 크리쳐용 살상 무기는 외투 안주머니에서 꺼내지도 못했다는 게. 정작 필요할 때 쓰질 못했으니 바보 같다고 해야 할지…. 이런 꼴이 된 게 우습기도 했다. Z의 물음에 대한 답은 오롯이 꺼질 듯한 숨결뿐이었다. 5개의 서로 다른 굴곡이 제 살갗에 닿았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섬세하다.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든 온기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우선은 최대한 멀리 뛰어왔어요. …E가 알려준 대로 지혈도 해봤는데, 그래도 피가 많이 나요…. E, 괜찮은 거죠?”

 

 

 

Z에게 절망적이고도 암담한 기분이란 무엇인지 알려준 적이 없었다. 행복과 슬픔. 아픔과 분노. 사람의 표정이 그려진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해주긴 했지만, 좌절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 같다.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터득해버린 모양이었다. 이렇게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Z가 혼자서 원래 가려고 했던 도시까지 갈 수 있을까…. 여기가 어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죽기 싫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도 이렇게 외딴곳에서, 죽기 싫었다. 만에 하나 Z가 도시에 무사히 도착하면? 그때는 무슨 일로, 어떻게 돈을 벌어서 먹고살 수 있지? 사람들 틈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아…, 죽기 싫어. 여기서 이렇게 죽기 싫어. 엄마, 아버지…. 무서워요. 감정과 사념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침착해. 진정해, E. 이럴 때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Z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를 강구해내야만 했다. Z라면 크리쳐의 공격에도 쉽게 죽지 않을 거니까, 살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정확한 건 자신이 있는 곳이 해안가라는 것이었다. 파도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따스한 햇볕이 구름 뒤로 몸을 숨기며.

 

 

 

 

 

 

04.

 

때는 만조(滿潮)였다. Z는 자신을 감아오는 두려움에 속절없이 쓸려가고 있었다. 이제는 피로 말라붙은 E의 입술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Z는 먹먹히 차오르는 감정을 억눌러본다. 다친 건 E인데, 어쩐지 자신이 아픈 기분이 들었다. Z는 다시금 열차에서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E, 피가 나요.”

 

 

 

단순히 E의 입술에서 흐르는 피만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Z가 그렇게 짚어주지 않아도 E는 자신의 상태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E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 세지 않기로 했다. 눈꺼풀을 덮은 핏줄기가 무거웠을 뿐만 아니라, 숨을 쉬기 불편하다 느꼈던 게 사실은 폐에 피가 차서 그랬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E는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어쩌면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말이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넘실대던 파도가 널뛰는 진동수를 가지고 맞부딪혔다. 배꼽까지 오르던 바닷물이 금세 가슴까지 밀어닥쳤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입김이 비를 맞아 사그라들 것만 같았다. 따뜻하던 E의 체온이 바다의 냉기 속에 가라앉고 있었다. Z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E에게 고백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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