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y Sky Blue Star l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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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샘플

leta

자유타입 8,000~8,500자로 작업했습니다!! 헤헤 정말 즐거운 작업이었어요💕💕


 

 

 

 

 

Ieta

 

Cast. F & R

 

 

 

 

 

 

01.

 

수요일의 아침은 월요일의 아침보다 고요하고 조화로운 경향이 있었다. 평일의 중턱이라서 그런 걸까. 물론 주말아침에 비하면 소란스러운 축에 속했지만, 수요일은 수요일만이 가지는 고유의 안락한 분위기가 있었다. 허공을 떠다니는 도시의 소음은 분주하게 나다니는 사람들 틈의 작은 여백처럼, 출근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한산해진 거리의 여유를 즐기는 비둘기를 연상시켰다. 창밖으로 들리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나, 사람들의 대화 소리까지도. 너무 적막하지도, 그렇다고 시끄럽지도 않은 오전의 가장자리였다.

 

그런 오전의 햇발이 한 발짝 늦은 R의 하루 시작을 알렸다. 하늘거리는 커튼 한 꺼풀이 불어오는 봄바람에 옅은 꽃향기를 끌어왔다. 초봄의 매화는 복숭아꽃에 비해 색이 유난히 짙었다. 백색의 수수한 꽃잎도 매력적이지만, 가지에 흐드러지게 매달려서 벚꽃보다 일찍 계절을 시작하는 붉은 꽃망울도 그 못지않게 이목을 끌곤 했다. R과 F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원엔 아직 가시지 않은 겨울의 세한 한기를 가득 머금고 이른 새해를 맞이하는 망울들이 잔뜩 이어져 있었다. 하느작거리는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온 가는 빛줄기가 R의 감은 눈가를 간질였다. 일어나야 하는데…. 가만히 누워 은은한 매화 향을 맞자면 그는 찌뿌듯한 몸을 일으키기 위해 가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전신을 억누르는 답답한 열감이 R의 다짐에 훼방을 놓고 있었다. 벌써 F가 출근한 지 2시간은 족히 지난 시간이었다. R은 침대 옆 탁상에 놓인 시계를 보려 힘겹게 뒤척였다. 며칠간 너무 무리했던 탓일까. 잔뜩 찌푸린 미간을 펴지도 않은 채 한쪽 눈을 가늘게 뜨면 흐린 시선에 디지털로 된 시간이 어렴풋이 비쳤다. 백색의 데이터가 깜빡이며 11시 34분을 알렸다.

 

R은 겉마른 입술을 벌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겨우 들이마신 숨마저 답답하게 느껴졌다. 겨울도 어언 끝나가니 슬슬 가습기를 넣어도 되지 않을까 했는데. 일찍 창고에 넣어둔 게 화근이었다. 건조한 실내 공기에 겨우 뜬 눈마저 이내 감기고 만다. 대체 어쩌자고 이 시간까지 누워있었지. 이번에도 점심 안 챙겨 먹으면 F가 걱정할 거야…. 하지만 급한 일도 없으니까 조금만 더 늦장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쉬이 움직이지 않는 몸에 R은 저만의 싸움을 이어 나갔다. 요 며칠 제대로 자지도 않고 밤을 지새웠던 탓인지 체력이 영 따라주질 않았다. 기우인가, 누적된 피로가 한 번에 밀려오는 건가, 싶어서 그냥 넘겼던 몸 상태가 점점 나쁜 쪽으로 규모를 부풀려가고 있었다. R은 솔직히 이 정도면 몸이 내 생활 패턴에 맞춰서 적응해야 하는 게 아닌지 슬금슬금 짜증이 밀려왔다. 일이 많이 들어온 게 내 잘못도 아니고. 커다란 침대에 홀로 누워 괜스레 화풀이할 대상도 없이 신경질을 내고 있자면 이내 서러워지기 마련이었다. 넓은 시트가 허전했다. 자신의 양옆에 자리한 텅 빈 공간만큼 R의 마음속에도 빈자리가 생긴 기분이 들었다. 아프니까 쓸데없는 잡생각이 다 드네. R은 아침까지 함께 있었던 이를 자연스레 떠올렸다. 탁한 금발과 깊은 바다 냄새가 나는 맑은 눈동자. 그의 웃는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R은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얕은 숨을 뱉었다. …F는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아플 때면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흐르는지, 시간이 아무리 상대적이라지만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면 금세 세상의 빛이 바뀌어 있곤 했다. 청명하게 빗금을 그리던 순백의 빛이 어느덧 오후의 홍차를 머금은 듯 연한 주홍빛으로 물들어 R의 손등을 덮고 있었다. 열이 올라 더웠던 건지 이불이 반쯤 내려가 있었다. 따스한 햇살에 몸을 맡기면, 이대로 몸이 무겁게 가라앉아 침대 밑으로 푹 꺼질 것 같다가도 한순간 붕 떠올라 구름 위를 날아갈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마뿐이 아니라 배며, 등이며 후끈 달아오른 신열(身熱)에 R은 부정하고 싶었던 자신의 증상을 인정해버렸다. 단순한 몸살이기를 바랐건만…. 그래도 혹시 몰라 아침에 감기약을 챙겨 먹었으니 망정인가.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F가 걱정할 텐데. 얼른 일어나야 하는데…. 야속하게도 식사 때를 놓친 게 몸에 더 부담을 준 모양이었다. 캄캄한 시야 속, 저 멀리 피어오른 빛 아지랑이가 알짱거리며 R을 놀려대어도 그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기에는 무리였다.

 

 

 

 

 

 

02.

 

그 시각, F는 옅게 노란 기가 도는 박하색 행주로 카페 테이블 위에 점점이 그려진 커피자국을 닦아내고 있었다. 방금 막 매장을 나선 손님이 통창 너머로 F를 스쳐 지나갔다. 어느덧 오후 1시를 맞이한 카페는 손님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 한산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카페 내에는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나른하고도 느린 박자의 연주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F는 무언가 걱정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았다. 테이블을 닦는 손놀림은 점차 느려져, F가 닦고 있는 좌석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마지막 손님이 F의 얼굴을 흘깃거릴 정도였다. F의 초점은 볕이 들어 밝은 베이지색을 띠는 책상을 향하고 있었지만, 이미 닦은 곳을 몇 번이고 다시 문지르고 있었으니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는 게 분명했다. F는 심지어 카페 포와로에서 일하는 다른 점원, A가 자신의 뒤로 다가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공안 경찰인 그가 이 정도로 둔하게 구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어딘가 정신을 따로 둘 곳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F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둔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알림을 최대로 키워놨으니 무슨 연락이 왔더라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F가 자신도 모르게 거듭 한숨을 뱉어낼 때, 어느새 바로 뒤까지 다가온 A가 장난스런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계속 한숨만 쉬던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거예요?”

 

 

 

평소라면 이런 유치한 장난에 놀라지 않았을 F였지만, 이번만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A의 말대로 고민이라면, 당연히 있었다. 출근하고 나서부터 R에게 문자를 몇 통이나 보냈는데 아직 답장이 한 통도 오지 않은 게 그랬다. 며칠 동안 밤샘작업을 하더니, 잠이라도 자고 있는 건가. 단순히 그렇게 넘기기에는 오늘 아침만 해도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내가 조금 더 신경 썼어야 했어. 그가 초조하게 연락을 기다리는 애인의 키와 그다지 차이 나지 않는 높이를 내려다보면, F는 제 연인의 것과 확연히 다른 청록색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R은 괜찮은 걸까. 이런 상황에서도 제 연인에 대한 걱정이 달아나질 않았다. 애써 멋쩍은 듯한 미소를 어색하게 덧그린 채, 눈썹을 누그러뜨리던 F는 조금은 얼빠진 목소리로 짧게 반문하며 한 발짝 물러섰다.

 

 

 

   “네?”

 

 

 

뒤로 물러나봤자, 그곳엔 자신이 닦던 책상뿐이라, 어쩌다 보니 책상 끝에 걸터앉은 꼴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 순간에도 휴대전화 액정이 아래를 향하도록 책상을 짚은 F는 자연스레 A의 시선이 분산되도록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양 짧게 웃음을 흘렸다. 물론 그런 F의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A는 F가 한숨을 내쉴 때부터, 그러니까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기 훨씬 전부터 F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F의 오른손을 향해 곁눈질을 했다. F가 연애 중인 사실은 이미 알고 있던 A였기에, 그는 저번에 스치듯 본 R의 겉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탐스러운 검은 머리칼의 부드러운 모카색 눈동자. A가 떠올리는 R의 이미지는 수수하면서도 동시에 선이 얇아 어여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오른쪽 이마에 흉을 가지고 있는. A는 짐짓 고민이라면 들어줄 것처럼 입을 다물고서 작게 소리를 흘렸다.

 

 

 

   “흐음…, 연인인가요?”

 

 

 

끝이 올라간 물음은 F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이미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다 알고 있지만, 예의상 모르는 척이라도 해주겠다는 투였다. 덩달아 F가 얘기를 편히 꺼낼 수 있도록 미리 판이라도 깔아주는 식이기도 했다. F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고서 제 휴대폰을 바지 뒷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R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은 건 이미 확인했으니, A의 앞에서 미련 넘치는 사람처럼 멍하니 휴대폰을 들고 있기는 머쓱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F는 사실상 미련과 걱정이 넘치는 처지가 맞았다. 그를 대변하듯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도 함께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은 F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어떻게 알았어요?”

   “딱 보면 척이죠.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음…. 오늘 아침에 조금 아파 보였는데, 도통 연락이 되질 않아서요.”

   “세상에! 그러면 빨리 가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마침 지금은 좀 한적하니까….”

 

 

 

기실, F는 A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사정까지 얘기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한 번 물꼬를 트고 나니 계산이 확실한 만큼 다정한 A로선 뒷말이 나오는 게 퍽 자연스러웠다. F는 A의 말에 잠시 멈칫하다 그의 눈을 곧바로 마주했다. 방금까지 풀이 죽어있던 눈동자가 이채를 머금어 투명하게 반짝였다. 대화가 이렇게 진행될 건 예상했지만, 솔직히 미안해서 먼저 꺼내지 못한 말이었다. 물론 F의 성격을 따지자면, A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도 F가 A에게 자리를 비워도 되겠냐고 말을 꺼내는 건 시간문제였을 테지만 말이다.

 

 

 

   “그럼, 제가 다음에 대타라도 서줄게요. 정말 고마워요.”

 

 

 

F는 자기 말이 끝나자마자 무섭게 황급히 앞치마를 벗어두고서 옆으로 비켜났다. F의 재빠른 행동거지에 A는 뒤늦게 아…, 네. 라고 덧붙였지만, F는 그의 대답을 제대로 들을 여유조차 없는 듯했다. A는 나갈 채비를 하는 F를 보면서 책상 위로 손을 올려 몸을 기대었다. 두 분 별다른 탈 없이 계속 행복하시면 좋겠네요. 카페를 나서며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볍게 까딱이는 F를 향해 A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03.

 

R의 휴대폰이 그의 발치에서 연신 묵직한 진동 소리를 뱉어냈다. 소리를 최대로 키워도 겨우 들을 만큼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열감은 R의 오감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동안 작업에 집중한다고 모든 알림을 진동으로 맞춰놨더니 R은 매트리스가 울릴 만큼 큰 진동조차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기울어 겹겹이 자리한 건물에 볕이 가릴 시간이었다. 어젯밤, 길고 긴 작업을 끝내자마자 침대로 뛰어들며 제대로 충전기도 꽂지 않아 켜진 배경화면 속 배터리는 겨우 10% 안팎이었다. 부재중 전화가 2통. 카톡이 4개, 문자가 3개였다. F와 함께 찍은 사진이 화면을 가득 덮었다가도, 곧 부재중 전화 3통이란 글자와 함께 액정은 검은색으로 물들고 만다. R의 다물린 잇새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작게나마 흘러나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둔해진 R의 후각을 뚫고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집안을 온통 뒤덮었다. R은 자신의 이마를 덮은 차가운 감촉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어느 정도 열이 가라앉은 건지 가늘게나마 눈을 뜰 수 있어 다행이었다. 붉게 충혈이 된 흰자 중간의 다갈색 홍채 색이 더 짙게 물들었다. 때마침 쟁반을 들고서 방에 들어온 F가 겨우 깨어난 R을 발견하고서 가까이 다가왔다. 고열일 때는 땀도 많이 흐르지 않기 마련이다. 열이 좀 떨어지고 나서야 R의 옷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R은 제 허벅지에 달라붙은 옷감이 걸리적거려 작게 뒤척였다.

 

F는 R이 일어나면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하지만 아픈 R을 두고 잔소리하자니, 그건 그거대로 속상한 일이었다. 죽을 끓이는 내내 F는 R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는 짧게 호흡을 가다듬고선, 침대 옆에 앉아서 들고 있던 쟁반을 침대 옆 선반에 내려두었다. 비접촉식 체온계를 집어 든 F는 R의 이마 위에 올려진 물수건을 옆으로 살짝 치우고선 열을 쟀다.

 

 

 

   “…F?”

 

 

 

삑-, 짧은 기계음이 들리자 R은 마른 입술을 달싹여 음성을 내었다. 고작 몇 시간 목을 축이지 못했다고 R의 목소리는 완전히 잠겨있었다. 아마 말을 하지 못한 것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열이 38도를 맴돌았으니 건조한 공기와 덩달아 성대에 무리가 간 탓이었다. R은 상이 두어 개로 나뉘어 돌아오는 시야 사이로 F를 바라보았다. R은 지금 자신이 보는 F가 자신이 너무 아파서 보는 헛것은 아닐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속눈썹의 첨예한 그림자가 R의 붉어진 눈가를 덮었다. F는 그런 R을 내려다보며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주었다. R의 눈이 부실까 봐 방에 불을 켜두지 않아 방안은 침침했다. 흔들리는 산들바람을 따라 들어오는 1시 30분경의 햇빛은 연노란 PVC를 투과해서 보는 것만 같았다. F의 얇은 금발이 한층 명도를 올려 반작였다.

 

 

 

   “걱정했어. … …연락도 안 되고.”

 

 

 

탓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R이 아픈 이유를 굳이 꼽자면 순전히 R의 잘못이긴 했지만, F는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의 일에 시비(是非)를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F는 R을 걱정했던 만큼, 진심으로 자신이 R을 걱정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물론 말하지 않아도 그가 제 마음을 일찍이 알고 있음을 알기에 굳이 표현하지 말고 마음속에 묻어두자고, R이 깨어나기 전까지 홀로 생각을 정리했지만 말이다. 땀에 젖은 R의 머리카락이 뭉쳐 F의 손에 걸렸다. F는 엉킨 머리카락을 검지와 엄지로 문질러 아프지 않게 하나씩 풀어냈다. R은 그 다정한 손길과 사선으로 내리는 햇발에 색이 짙어진 F의 수륜을 건너다보았다.

 

 

 

   “응…, 미안해. F.”

 

 

 

퍽 담담한 목소리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채 식지 않았는데, 아픈 R이 오히려 놀란 F를 달래고 있었다. F가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약한 모습이었다. 일부러 크게 혼내지 않고서 참아내는 모습이, 나중에 낫고 나면 잔소리는 좀 들으려나 싶었다. 자신이 아픈 만큼 속상해주고, 그래서 함께 있을 때는 과경에 서글펐던 찰나조차 금세 사그라들게 했다. F는 어른스럽다면 어른스럽지만, 은근히 속이 좁은 면도 있고…. 나름대로 질투도 심하지. 다른 남자 얘기를 하면 유독 더 그렇기도 하고 말이야. R은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고서 발그레한 뺨에 미소를 띠었다. 힘없이 이어지는 작은 웃음소리에도 R의 미소는 말갛기만 했다. F는 그런 R을 보며 의문에 잠긴 채 한쪽 눈썹을 비뚜름 올렸다.

 

 

 

   “뭐야, R….”

 

 

 

F로서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유는 몰라도 R이 좋으면 됐지 싶었다. R은 F의 그런 표정을 보고서 결국 가가대소하고 말았다. 정말이지, 귀여운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근무 중일 시간인데, R은 손을 들어 F의 손목을 잡아보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라면 뭐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내가 연락이 안 된다고 한걸음에 달려오고….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벅차 어느덧 많이 내린 열에도 한층 주홍빛으로 뺨이 물들었다. 이런 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R의 밝은 눈동자에 휘어잡기 어려울 만큼 아득한 애정이 피어올랐다. 자신이 못내 사랑하는 F. …나의 F.

 

 

 

   “F가 귀여워서어.”

 

 

 

R은 말끝을 길게 늘이고선 천연덕스레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날카로운 눈매가 유순하게 휘어 장난꾸러기 같은 면모가 돋보였다. 맑은 창공을 연상시키는 F의 푸른 눈동자에 R의 또렷한 소태(笑態)가 비쳤다. 은은하면서도 선명한 상이 F의 뇌리에 제 모습을 본떴다. F는 시간이 잠시간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의 R을 절대로 잊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제 머릿속에 사진처럼 찍어두고 싶을 정도로 먹먹한 감정은, 화창한 날씨의 파도처럼 일렁였다. 골목 사이에 어스름 핀 사람들의 그림자마저도 하늘대는 수요일. 이 한결같은 먹먹함의 이름은 사랑이었다.

 

 

 

   “…사랑해.”

 

 

 

평상시에도 곧잘 말하는 그 단어가 깊이 함축된 의미를 품고 공중에 흩뿌려졌다. 사랑의 농도가 공기를 통해 퍼질 수 있는 거라면, 창밖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작은 허밍처럼 그들의 사랑은 분홍빛 기류를 뽐내며 이 날의 수요일을 이내 순애로 물들이고 말 것이다. 자신이 먼저 말하려고 했던 단어가 F의 입술을 통해 들리자, R은 조금은 분하다는 듯 뾰로통한 눈빛을 보냈지만, 그마저도 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표현하고 싶었던 만큼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F가 없어서, 그 시간동안 많이 보고 싶었다고. 아파서 속상하고 서글펐다고. 그 와중에 생각나는 건 온통 당신 생각뿐이었다고. R은 그에 화답한다.

 

 

 

   “사랑해, F. …음, 어제보다 오늘 더?”

 

 

 

R의 귀여운 말에 F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화려하지 않으나 그윽하여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일상을 채우는 매화의 꽃향기가 둘을 포근히 감쌌다. F는 손목에 닿은 저보다 작은 손톱과, 손가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머리카락을 쓸던 그 다정스런 손길로 R의 손을 잡았다. R의 손톱만이 F의 손등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창밖에는 둘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새어나온다. 하얀 캔버스에 점을 찍은 듯 세상을 적시는 붉디붉은 꽃잎. 공원의 한 면을 가득 채운 나무들이 바람에 꽃잎을 하나둘 떨구는. 수요일은 수요일만이 가지는 고유의 안락한 분위기가 있었다.

 

 

 

   “…있지, F. 다 나으면 공원에 핀 매화 구경이나 하러 갈까?”

   “그러려면 일단 밥부터 먹어야겠지?”

   “알았어. 하지만 약속이다? 다 나으면 꼭 구경하러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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