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y Sky Blue Star 落木寒天(낙목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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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샘플

落木寒天(낙목한천)

연성교환 감사합니다! 제야의 유망 만 자 이상으로 진행해보았습니다!

트리거 : 생선, 심해 관련 묘사 주의


 

 

落木寒天

CEN & HSH

 

 

 

한 나라가, 그리고 그를 이루던 모든 사회가 완전히 마비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과연 마비라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 새하얀 눈꽃이 흩날리는 세상은 어느덧 궁동(窮冬)의 달콤한 수면에 잠겨 기나긴 동면에 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대목에도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아 길거리는 지나치게 한산했다. 얼음장 같은 삭풍이 뼈를 엘 정도로 불어대는 통에 장갑을 끼지 않은 S의 손끝이 붉게 물들었다. 짙은 자주색이 감도는 S의 머리카락이 짙은 한기에 속절없이 휘날렸다. 빗금처럼 그어진 회색 타일의 맞물린 사이사이, 하얀색 눈발이 모여 몽글하고도 포근한 솜뭉치처럼 보였다. S는 애꿎은 그 위를 신코로 문지르며 잇새로 입김을 뱉어내었다. 드문드문 타일 끝이 얼어 미끄럽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산책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더구나 날씨 탓을 하며 만남을 미루기엔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물론 미룰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말이다.

 

나름의 적응이라면 적응인 걸까. 물론 적응할 시간조차 녹록하지 않았다. 첫날엔 누구라 특정 지을 것도 없이 갑작스레 발생한 재난에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저들마다 각자의 공황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깨어나지 않을 이들의 어깨를 휘어잡고 비명을 질러대는가 하면, 앰뷸런스나 119 할 것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전화를 걸어대는 통에 가히 통신이 마비될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일지 어언 하루가 끝나갈 무렵이 되자 아직 거동할 수 있던 이들은 여태 깨어나지 못한 이들이 다시 저들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걸 순순히 인정하고야 말았다.

 

물론 그때부터가 제대로 된 재앙의 시작이었다. 뒤늦게 위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며 광증을 앓는 이들이 거리에 넘쳐났고, 이러한 재앙도 금방 물러갈 거라며 정치적인 발언을 해대는 이들도 즐비했다. 그들이야 어떻든 우인이 아니고서야 한 번 도래한 영면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게 명명백백했다. 단순히 전해 듣는 것보다는 눈으로 직접 보고 배우는 게 확실히 인정하기에도 빨랐다. 그래, 어떤 방식이건, 원인이 무엇이건 결국 이들은 영영 눈을 뜰 수 없다. 재앙은 공평했다. 이 병은 성별도 재산도 나이도 가리지 않으니 다음은 누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조차 그러했다. 한번 끊긴 통신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통신을 복구할 인력이 부족한 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육체를 품에 안고 현실을 부인하는 이들은 여전히 차고 넘쳤지만, 뉴스는 이를 구태여 보도하지 않고 있었다. 그 어떤 재난보다 조용하며 다정히 다가온 종말은 근 하루 만에 만연해진 죽음을 사사롭지 않게 만들었다. 기자 정신이 투철한 이 몇몇만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인터넷에 대고 속보라며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3일, 4일이 지나고 나면 과연 몇이나 남아 인류의 마지막을 볼 수 있을까. 그 짧은 시간 안에 백신이 나올 리도 만무했지만, 여태껏 그런 희망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S가 그랬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부유하는 S의 마음은 어제부터 유난이었다. 잠자리가 편치 않았던 탓인지, 어제 그렇게 E와 연락이 끊기고 난 이후로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소름에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전기와 인터넷만은 아직 멀쩡히 들어와서, 운이 좋다면 컴퓨터의 화상 통화를 통해 다른 이들과 연락할 수도 있다는 풍문이 커뮤니티를 떠돌았다. 물론 화상통화를 하지 않아도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은 충분했지만 이럴 때일수록 좋아하는 이의 얼굴을 보고 싶은 건 당연지사 아니겠나. 되든 안 되든 E와 S는 도박처럼 기대를 걸어보았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두어 시간을 기다린 끝에 가까스로 서버에 접속할 수 있었다. 서버는 관리자가 몇 남지 않은 것인지 언제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롭기만 했다. 들어오는 것도 거의 운에 가까웠으니 이대로 오류가 생겨도 재접속 할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상황은 어떤지. 괜찮은지. 대부분 그런 부류의 말들이 여럿 오갔다. E가 가볍게 농을 던지면 S는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냐며 받아쳤지만, 그래도 목소리에 아플 정도로 날카로운 감정이 담아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불안할지언정 서로에게 예민하게 굴지 않았다. 그것이 어른으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법이었다. 아무리 괜찮은 척, 무언가 해결책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애써 분위기를 환기하거나 대화를 이어나가 보아도 짤막한 이야기 주제들 속엔 스치듯 불쾌한 간극이 자리했다. 겨우 몇 초밖에 되지 않는 적막에도 상황의 심각성은 쉬이 뿌리치지 못할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E와 S는 그를 의식하듯 일부러라도 한마디를 더 내어야만 했다. 그러다 결국 내일 만나자는 말을 먼저 꺼낸 건 E였다. 과연 내일 서로를 만나기 위해 외출을 하는 게, 지금 이런 상황에서 현명한 선택일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안전을 생각한다면 집에 가만히 있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서로의 얼굴을 보고 온기를 나눌 수 있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S는 E의 말에 깊은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화면 너머의 E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시선이 옆으로 빗나간다. 아,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거절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지만 막상 거절하려고 해도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미치광이라도 만나 범죄에 휩쓸리면…, 과연 경찰이 구해주러 오긴 해? 경찰이 아직 남아있긴 하냐고. 어쩌면… 잠이 들어 죽는 것보다 사람에게 죽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머릿속을 찾아온 수많은 물음에 침묵이 길어지자,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그런 S를 지켜보던 E였다. 새벽을 훤히 밝히는 스탠드 아래로 연노란빛의 얇은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렸다. 자연스레 오른 입매가 제 연인을 달래보려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아니면 역시… 집에 있는 게 나으려나. … 뭐, 난 이렇게 보는 것도 좋아.”

 

 

 

차라리 이럴 때는 불안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확신을 안겨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무리 뺀질뺀질하다고 한들 다가올 아침, 서로에게 닿기까지 아무런 일도 없을 거라는 과언은 함부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도전이라는 걸 아니까, 자신이 거는 만큼 당신도 걸어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E, 저 혼자만 밖으로 나가 S의 집으로 가는 게 오히려 마음만은 편할 게 뻔했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S에게 혼날 건 안 봐도 비디오였지만 체력으로는 어디서 뒤지지 않는 편이었으니 그쪽도 나름 걸어볼 만했다. 사람의 마음은 이중적이고도 미련한지라 위험성이 높은 만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거세게 일었다. 그래서 사실은 농담이었어, 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외면하기 어려울 정도로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찝찝한 이물감에 E는 비스듬히 미소를 그려내었다. 어떻게든 내일 S를 만나야겠다는 뜻만은 확고했다. 침울하고도 깊은 감정이 눈빛을 따라 흘러나왔다. S는 제 화면에 비치는 이의 불안을 삥등그릴 정도로 섬세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었다. 게임에서 만난 E와 이런 관계가 되기까지 이뤄졌던 수많은 감정적인 교류에서 S는 툴툴거릴지언정 자신이 E보다 어른인 것을 쉽게 망각하지 않았다. 특히 이런 순간에는 더욱 자신이 연상이라는 걸 상기해야만 했다. 단순히 살아온 세월이라는 조촐한 이유에서 뿐이 아니더라도 가끔은 이성보다 감성을 따르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었다.

 

 

 

“… … 만나자. 대신 오는 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연락하는 거야.”

 

 

 

S는 E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방법은 없지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느끼는 시간의 무게가 과중하듯 E도 그럴 게 분명했다. 밤하늘을 담은 듯 검게 물든 눈동자가 인공적인 빛을 먹어 먹먹히 일렁인다. 정말이지 도울한 새벽이었다. 새벽의 공기는 지나치게 고요한 만큼 지나치게 감성적이었다. E는 웹캠을 거쳐 디스플레이에 따라 조금은 변색되었을 S의 입술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리 바라본다고 해도 각도에 따라 E가 정확히 어디를 보는지 상대방은 모를 일이었다. 단순히 화면 아래 그 언저리를 보고 있구나, 그 정도로 가늠할 수 있었다. S 자신도 조금은 놀랄만한 답이었으니 E의 반응 역시 당연한 축에 들었다. 아마… 내가 긍정적인 답을 할 거라 생각 못했던 거겠지. E가 뭐라 말을 내뱉기도 전에 S가 뒷말을 마저 이어 붙였다.

 

 

 

“위급할 때는 먼저 돌아간 후에 연락해도 되니까. … 아직 카카오톡은 되는 것 같으니까, 알겠지?”

 

 

 

같은 어미를 두 번이나 반복하는 건 그에게 제대로 강조하고자 하는 바였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안위부터 걱정하기. 상대방이 걱정할 테니까 귀가한 후에는 바로 연락해주기. 위험성이 큰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끔은 이리 미친 짓도 하는 게 바로 사랑이었다. S의 진중하고도 담담한 음성은 자신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E에게 그대로 전해주었다. S는 동요하지 않으려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면 하는 얘기에는 일부러라도 목소리를 깔았지만, 그 후에는 억지로라도 가벼운 웃음을 흘러내곤 했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데 괜히 겁만 더 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강약 조절은 사회생활의 기본이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더구나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더 그랬다.

 

 

 

“네네, 잘 알아들었네요. S누나야말로 제대로 연락하는 게 좋을 거야. 먼저 말 꺼낸 사람이 더 잘 지켜야 하는 거 알지?”

 

 

 

E는 S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한 치의 오해도 없이 받아들인 듯했다. 긍정의 대답을 들었으니 분명 기분은 더 좋아져야 하는데, 괜스레 엄습한 초조감을 떨치기에는 영 께름칙했다. 어느샌가 머리 위로 드리운 회갈빛 우울이 긴 너울을 그리며 E의 다색 홍채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림자처럼 자리한 음영은 인간의 가시로는 쉬이 감정 내릴 수 없이 흐릿했다. S의 눈에 비친 E의 소리 없는 웃음은 어쩐지 허탈해 보이기도 했다. 애써 끌어올린 분위기이기에 심정은 더 비참한 것을. 어쩌면 이 대화가 둘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잡념과 찜찜한 울결이 한데 모여 박동하는 심장 소리를 타고 E의 목덜미를 덮었다. E가 시작해서 S가 내린 결정이더라도, 결국 시발점은 자신이었기에 E는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기 자신을 탓하고 말 일이었다. 비록 S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무관한 일이었다.

 

 

 

“그럼 오후 1시쯤에 분수대 앞에서 볼까? 시간 괜찮지?”

 

 

 

어떤 재난이 닥쳐도 출근만은 꼭 해야 했던 한국인들답게 이번에도 정시출근하려나 싶었던 건, 회사 간부들이 먼저 깊은 영면에 든 바람에 무의미하게 되었다. 인제 와서 출근해봤자 월급을 주는 이도 없을뿐더러 언제 죽을지 모르는 마당에 회사가 제대로 돌아갈 리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건 이 서버를 관리하는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서버가 튕기는 건 눈을 깜빡이는 1초의 시간보다도 더 갑작스러웠다. E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S가 흘러내린 제 머리칼을 손끝으로 꼬았을 때, 불현듯 아무런 소음도 없이 검게 물들어버린 액정 위로 Error, 라는 짤막한 단어가 떠올랐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검푸른 심해마냥 아가리를 벌리는 모니터가 발간 형광등에 비쳐 번지르르한 윤이 났다. 결대로 반짝이는 물고기의 비늘이 눈앞에서 생동하는 괴리감이 S를 덮쳤다. 물밀듯 밀려오는 섬뜩함에 S는 화면에 비친 자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E도 S 못지않게, 출처를 알 수 없이 차올라 전신을 옥죄어 오는 공포에 빠르게 잠겨가고 있었다. E의 머리칼을 서서히 잠식해가던 공포는 이틀 전부터 E의 사고를 때때로 망쳐놓곤 했다. E는 이보다 강한 정신력을 가졌다지만 어찌 된 이유인지 이 그릇된 절망에서 쉬이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과 다름없었지만, 이 또한 다 자신이 그려낸 거짓인 듯했다. 방안을 환하게 밝히는 백색 전등이 E의 머리 위를 작열하듯 일렁였다. 하얀색 글씨로 떠오른 문구를 찬찬히 되짚어보기라도 하듯 초점이 단어 한 가운데를 맴돌았다가 그 근본의 픽셀을 가늠하려는 듯 멀어진다. 흐려진 시선 속 E는 키보드의 F5 버튼을 소리 없이 누른다. 그 부드럽고도 가벼운 터치에 화면 왼쪽 상단의 페이지 새로고침 아이콘이 회전하기 시작한다. 그의 생이 끝내 사그라들지라도 멈추지 않을 것처럼 뭉툭한 화살표의 끝이 연신 제 꼬리를 쫓아 뱅글뱅글 원을 그린다. 그러한 꼴을 보다 보면 E는 과연 저 아이콘이 그리고 있는 게 원인지, 타원인지.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애초에 그런 생각조차도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1분에 약 20회. 매끈한 안와를 감싸 촉촉이 유지해야 하는 자연스런 반사행동에도 불구하고 눈꺼풀은 그의 홍채를 제법 긴 시간 동안 방치하고 있었다. 이토록 쓸데없이 빈번한 깜빡임도 어쩌면 다음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한 뇌의 리셋 기능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던가. 뒤늦게 첨예한 그림자가 동공을 덮어 그에게서 빛을 앗아갈 때면 그는 입매에 비뚜름한 모양새를 품어냈다. 아, 그래. 아무런 일도 없을 거야. 이럴 때가 아니라… 누나한테 연락해야 하는데. 삶과 의지를 쉽게 놓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명확했지만, E는 점차 희망도, 의욕도 잃어가고 있었다. E의 감정은 로버트 플루치크의 감정의 바퀴가 장애물에 걸려 한쪽에 턱 막힌 것처럼 같은 부분을 돌아갔다 되돌아오며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시야 가장자리에서 핸드폰 액정이 반짝 빛을 내었다.

 

끝을 알 수 없이 이어지는 기다란 무기력함이 그의 발치에 알짱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쉽게 잠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냐마는. 아니, 그것보다 E의 머릿속에 박힌 시간과 현실에서의 시간이 뒤틀려가고 있었다. 암을 품은 액정은 색을 또렷하게 비추지 않는다. 거울로써의 가치는 형편없이 낮은 그 위를 건너다보기만 해도 E의 안색은 충분히 창백했다. 핸드폰의 불빛이 다시 깜빡였다 사라진다. E의 얼굴이 일순간 그 빛에 먹혀 보이지 않았다가 곧 새카만 위로 형체를 드러낸다. 인간의 인지능력과 뉴런이 다루기에 광기란 그들의 능력 밖의 문제였다. 신호등이 깜빡이는 불빛처럼 그가 쥐고 있는 한줄기 이성은 깜빡, 깜빡. 앰뷸런스의 사이렌처럼 굉음을 뱉어낸다.

 

 

 

“아…. 정말 현실인지 게임인지 구분이 어렵네. 사실 이것도 게임 아닐까?”

 

 

 

아까 했던 실없는 농담이 다시금 E의 하순을 타고 허공으로 퍼진다. 기운은 빠졌더라도 대답은 해주었던 S의 음성이 감은 눈두덩이를 따라 E의 귓가에 와 닿는다. 그런 농담이 지금 나와? … 진짜 게임이면 좋겠어, 나도. S가 옆에 없다는 걸 알아도 E는 한차례 안도하고 만다. 잘게 키들거리는 소성이 방 한편에 울려 퍼졌다. E에게 S란 제일 미련으로 남게 될 것 같은 사람이었다. E의 우울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이대로 자신이 언제 죽게 될 것인지 알게 되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 병인지, 현상인지를 겪게 되는 이들은 전부 자신이 언제 죽게 될 건지 계시를 받는다고 하던데. 이대로 계시를 받아도 아무렇지 않을 거란 대책 없는 자신감이 들었다. 책상 위로 작게 쿵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떨군 E는 제 콧대 아래에 놓인 휴대폰은 더듬거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제 뺨 아래에 깔린 핸드폰을 들어 알림을 확인한다. 뒤늦게 연락이 여러 통 와있었다는 걸 인지한 그는 그제서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체를 곤두세웠다.

 

 

 

“뭐야, 나 왜 답장 안 보냈지? 진짜 미쳤나?”

 

 

 

혼잣말을 연신 구시렁대며 E는 S에게 답장을 보냈다. 분명 답을 보냈지만, 네트워크 상태가 영 양호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로딩에도 흰색 화살표만 끝없이 돌아갈 뿐 변하는 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다시 몇 번이고 답장을 보냈을 E였지만, 오늘은 불운하게도 확인할 정신적 여력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내가 허황하고 허무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꼭 꺼진 모니터 위에 작게 처박힌 Error.처럼 탁하디탁한 잿빛의 배경 위로 한 줄의 문장이 지나쳐 간다. 2022년 12월 24일 오후 12시 42분. 한 사람의 죽음치고는 정나미 없는 간결한 문장. E는 이게 말로만 들어온 계시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오늘은, S를 만나기 좀 어렵겠네. E는 작게 피식거리며 등받이에 제 몸을 묻었다. 일그러진 눈매가 짙은 음영을 그렸다. 네트워크가 다시 연결되고 S에게 보내진 답장은 미안해. 1시에 거기서 보자. 이 두 개뿐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15분 정도 일찍 나온 S는 얇게 얼음층이 깔린 분수대에 기대어 예전 같지 않은 주위를 둘러보다 의미 없이 휴대폰 화면만 두어 번 두드렸다. 재앙에 돌입한 지 이제 이틀째를 맞이한 오늘은 새벽의 염려에 비해 상당히 조용했다. 이제는 소란을 피울 사람들도 현저히 줄어든 모양이었다. 카카오톡 창에는 오늘 아침 S가 나오면서 E에게 보낸 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읽음 표시는 떠 있었지만, 그에 대한 말은 없었다. 이제는 카카오톡도 되지 않는 걸지. 늦게 일어나서 준비하느라 바빠서 그런 걸 거라고. S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서 오해하고 싶지 않았다. 떨어지지 않던 발을 억지로 떼어내어 나올 채비를 하면서도 그랬다. 걱정만 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움직여야 해. 약속했으니까. 스스로 계속 되뇐 끝에 약속 장소에 나올 수 있었다.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 하다 보면 상대가 무언가 평소답지 않을 때 그 변화를 알아차리는 건 중요한 문제였다. 더구나 그것이 E라면 더 그랬다. 상황이 이러니까 당연히 괜찮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차라리 더 진지하게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이냐고 물었어야 했던 걸까. 눈가 아래로 덧그려진 다크서클이 살아남은 이들의 근심을 대변하고 있었다. 들고 있던 휴대폰의 음향을 최대로 키워두고 다시 제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S는 저 멀리 지평선을 응시한다. E의 집은 저쪽에 있으니까, 분명 E가 나타난다면 저 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낼 테니. 부디 그가 별일 없길 바라며 소망을 품고 있었다.

 

 

 

“이 뺀질이. 늦기만 해 봐….”

 

 

 

새하얀 입김이 콧날을 타고 올라 S의 앞머리를 흐트러뜨린다. 한올 한올 옅은 숨결에 흩날리던 머리카락 위로 눈송이가 하나둘 내려앉는다. 콧잔등에 닿은 결정이 체온에 사르르 녹아내린다. 차가워. 중얼거리는 음성에는 어쩐지 물기가 서려 있었다. S는 이제 마디마다 붉게 물든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린다. 그때였다. 손가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지평선을 따라 한 인영이 제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S는 손을 내리고서 다가오는 이의 행색을 저만치 바라본다. 햇빛에 반사되어 밝게 감도는 탁한 노란빛이 제가 기다리던 이의 모습과 비슷했다.

 

애써 외면했던 S의 가장 큰 불안은, E가 우울함에 사로잡혀 약속장소에 나오지 못하는 것뿐이 아니라 어쩌면 E가 죽게 될 날짜를 받아놨음에도 제게 말하지 못하는 게 아닐지에 대한 걱정, 혹은 의심에 가까웠다. -단순히 이 상황이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우울해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걸까. 어떻게 보면 결과적으로 S가 한 생각도 맞긴 했다. S는 E의 우울에 대해 얘기를 들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런 기회는 없을 것이기에 결미엔 보이는 것만이 진실로 남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의심은 곧 원망이 아닌, E가 제가 없는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E라면 분명 지나가는 말이라도 제게 계시를 받았노라고 알려줄 게 분명하다고 S는 생각했다. 그리고 S의 생각은 정말 모두 옳았다.

 

시간이 빠듯해서 만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약속했으면 만나러 가는 게 옳았다. E가 먼저 말하지 않았나. 먼저 말 꺼낸 사람이 더 잘 지켜야 하는 거 알지?,라고 말이다. 몇 번이고 답장을 보내도 네트워크는 완전히 먹통이 되어버린 것인지 전송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오면 되는 일이었지만 한 번 시작된 허튼 사념은 E를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밤을 새운 E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응시하다 새벽에 다하지 못한 추억회상에 다시 홀리고 말았다. 발을 잘못 디뎌 칠흑 같은 수렁 속에 빠져버린 것처럼, 외출 준비를 해도 모자를 판국에 E는 S와 쌓아올린 추억들을 더듬어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룻밤을 지새우는 건 E에게 큰 지장을 줄 만큼 치명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단지 죽을 때가 다가온다고 하니 제 삶에 있었던 일들을 회고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또한 정신력이 약해진 인간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E는 제 의미 없는 생각들에서 벗어나 현실을 바라볼 그 짧은 시간마다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약속 시간을 앞당겨도 괜찮겠냐는 연락을 수십 번도 더 보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수신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은 이미 첫날부터 그를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찾아온 무력감은 그 재질이 많이 달랐다. E는 이미 제 감정들에 눈이 멀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한 발자국 움직이는 것도 힘이 들 정도로 무겁게 추를 올리는 숱한 감정들이 호르몬의 농간에 춤을 추고 있었다. E는 저를 짓누르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 속에서 변하지 않을 한 가지를 떠올린다. 자신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S를 찾아가야만 한다는 목표. 하지만 그 목표에 있어 더 이상 S를 근본적인 원인으로 두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목적이 집념이 되고, 그 집념만을 곱씹다 보면 사람은 정말 눈이 멀어버리기도 했다. 비록 제일 중요한 행동의 이유는 잊어버렸지만, E는 아무래도 좋았다. S를 만나러 가야 해. E는 시계를 돌아본다. 이미 시간은 오전 끝자락에 걸쳐져 있었다. 언제 이렇게 늦어버린 것인지 그녀의 집 앞까지 찾아가는 건 도저히 무리였다. 하지만 지금 뛰어간다면 적어도 만날 수는 있을 터였다.

 

 

 

“먼저 말 꺼낸 사람이 더 잘 지켜야 하는 거지…, 그렇지.”

 

 

 

E는 죽을힘을 다해 뛰어왔다. 흔히들 젖 먹던 힘까지라고 하던데. 정말 그 말이 왜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탁탁, 타일 위로 부딪히는 제 발소리에 맞추어 돌아간다. 죽음은 서서히 아주 느린 속도로 그의 뒤꽁무니를 쫓아온다. 조금이라도 멈춰 서면 넘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단순히 돌부리에 걸리는 게 아니라 아예 땅바닥 속으로 끌려들어 갈 것만 같았다. 알 수 없는 고양감이 날갯죽지 위로 허상의 날개를 달아준다. 하늘에 붕 뜨는 듯 몸이 가벼웠다가도 한순간 눈꺼풀이 세상을 집어삼켜 버릴 만큼 그 무게가 가중했다. 차가운 공기에 살갗이 빨갛게 물들어 끝이 갈라져도, 새된 바람에 피부가 거칠어져도 E는 그저 앞만 보고 달음박질했다. E의 시야에 드디어 S가 들어온다. 기이하게 반짝이는 이채가 눈동자를 가득 물들였다. 휘어진 입술이 가쁜 숨을 뱉어낸다. 아, 얼굴을 쓸어내리는 모습이 꼭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만 같아. 한 발짝. 한 발짝. 저를 향해 다가오는 S를 보며 웃음을 토해내던 E는 문득 제 몸이 점점 무너져 내리는 걸 느꼈다. 이게 무슨 느낌인지는 몰라도 제가 끝끝내 기다려오던 순간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듯한….

 

 

이 삶에 후회 따위는 없을 포근함이 E를 제 품으로 잠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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