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동양 페어, 자유 타입 5,400자 작업했습니다! >////<!! - 2023. 08 작업물
그날의 백로(白露) 가약(佳約)
⁋ 晰&補
그날은 신성하고도 요사스러운 날이었다. 마을 한복판에 놓인 드높은 반송을 중심으로 한 차례 여우비가 내려 뭇사람들의 뺨을 촉촉하게 적셨으나, 겨우 한 척밖에 되지 않는 건너편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나? 호랑이 장가가는 날에는 여우비가 내린다고.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물론 사방신인 晰 가 신부를 들이는 날에도 이리 비가 올 거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붉은색 가마에 얼굴 가린 장정이 넷이요. 아낙네며, 선비며 할 것 없이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기네들끼리 숙덕거리고 있었다. 補 의 귀에 그들의 이야기를 들린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마을을 지켜야 하는 수호신이 인간을 제물로 요구하니 하늘도 노했다든가. 흔히 말하는 여우와 구름의 사랑 이야기를 들먹인다든가. 당사자들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고 있는데, 주변에서는 저들만의 추문을 만들어내느라 바빠 보였다. 또 하나의 설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補 은 그들이 곁에서 무슨 얘기를 하여도 잠자코 있었다.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마냥 남의 일처럼 신기해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때 불현듯 補 의 귓가로 파고드는 하나의 질문. 왜 하필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인 거요? 그도 그 이유가 알고 싶었다. 수호신은 어떤 기준으로 자기를 제물로 택한 걸까. 수호신이라는 자는 어찌하여 이제껏 교류 한 번 없다가 왜 인제 와서 이런 강압적인 태세를 취하고 있는 걸까. 補 은 추상적인 풍문보다는 실질적이고도 현실적인 궁금증에 더 중점을 두고 있었다.
補 은 정갈하게 차려입은 비단옷을 아래로 쓸어내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손을 허공으로 뻗을까 싶으면 빗발은 점차 얇아져 이내 그곳의 구름마저 차차 걷히고 있었다. 새하얀 조각구름 사이로 누런 빛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는 補 의 표정은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하고도 초연(超然)해 보였다.
길고도 섬세한 속눈썹과 오뚝한 콧대. 백옥처럼 고운 피부에 무엇을 생각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검고도 총명한 눈빛. 그를 모르는 이들이 지금, 이 광경을 본다면 그를 제물이 아니라 오히려 신이라고 칭할 만큼 補 은 기이한 분위기를 지닌 사내였다. 마을 사람이라고 그의 속내를 훤히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들은 여전히 補 을 두고서 안타까워하거나, 자기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거나 각자의 동상이몽에 빠져 있었다.
약속한 시각이 되어 마을을 떠날 때가 되어도 補 은 사람들이 기대한 것만큼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인간 아닌 이들의 안내를 따라 가마에 오르고 나면 공중으로 뜨는 느낌과 동시에 이상하리만큼 포근하고도 아늑한 기분이 補 을 감싸 안았다. 내가 정말 인간의 영역을 넘어가는구나. 補 은 그리 생각하며 창을 조금 열어두었다. 가마가 마을을 떠날 때는 뱀이 똬리를 틀고 잠에 드는 시간, 사시 이각이었다.
그가 궁에 온 지 벌써 이레가 되었다. 자신을 신부로 들인 이의 얼굴을 보지 못한지 어느덧 일곱 날이나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짧고, 누군가에게는 긴 나날들이었다. 고작 일주일이었지만, 補 이 이 으리으리하고도 고풍스러운 궁궐의 어엿한 안주인으로 자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 사람을 구성하는 품새와 언행에 타고난 품격이 느껴지던 이었으니, 그의 적응력만 따지자면 이곳은 마치 일찍이 補 이 당도했어야 하는 곳인 것만 같았다.
晰 께서는 지금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補 은 이곳에 온 지 닷새부터 시종에게 먼저 수호신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부부 사이를 오가는 이의 마음고생과 수고로움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는 언제까지고 晰 가 자신을 피해 다닐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지 시간문제였다. 補 에게 고개를 숙이고서 방을 나서던 시종은 무언가 찔리는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연신 송구하다는 말을 그에게 몇 번이나 내뱉었다. 그럴 때면 補 은 이해하고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라며 자애로운 말씨로 그를 보낼 뿐이었다.
補 은 그사이 익숙해져 버린 복도를 거닐며 무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수호신의 바쁨을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렇게 내버려 둘 거라면 무엇을 위해 자신을 서둘러서 데려온 것인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은 수호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지 않나. 이런저런 생각이 길어질 때쯤 그는 문득 나풀거리는 하얀 천을 몸 주위에 두른 채 뛰어가는 통통한 너구리와 토끼를 보았다. 두 눈에 총기가 넘치는 이들은 그 자태가 신선인 것만 같았다. 비록 투덜거리며 잰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내 한양에서 제일 좋은 비단으로 골라 옷을 마련했건만. 이번에도 마음에 드시지 않는다고 퇴짜를 놓으시면, 나는 이제는 어디로 가야 좋을지 모르겠소.”
“자네…, 그 마음 모르는 것은 아니나 이럴 시간이 어디 있나. 얼른 걸음이나 재촉하게.”
…옷? 수호신을 만나러 온 모양이었다. 補 은 인기척을 줄이고서 조심스레 그들을 뒤따랐다. 아무리 일정 거리 이상 떨어져 걷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어찌나 정신이 없는지 補 이 자신들의 뒤를 밟고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의 보폭보다 補 의 보폭이 더 큰 탓에 補 은 힘든 기색 하나 없었지만, 신선들은 일찌거니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신선들의 걸음이 점차 느려져 어느 방문 앞에 멈추어 섰다. 무언가 말이 오가는가 싶더니 이윽고 방 안에 있던 시중이 그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이렇게 계속 시기가 지체되면 내가 그를 일찍 데려온 이유가 있겠느냐. 그와 식을 올리고 싶어서 판을 크게 키웠는데, 좋은 인상을 심어줘도 모자란 시국에 신부가 온 지 어언 엿새가 족히 넘었다. 그동안 아직도 제대로 된 옷감을 구하지 못했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글쎄, 덕분에 내가 아직 초야도 못 치르고 있지 않으냐.”
“…정말 송구하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좋은 마고자를 구해왔지요. 선산(善山)에서 가져온 한복입니다. 천일기도로 축복까지 내렸으니 이 결을 한 번 보시옵소서. 마치 은하수로 수를 놓은 것 같지 않습니까?”
“아니면…, 아니면 이건 어떠하옵니까? 이것도 한 번 봐주시옵소서. 분명 흡족하실 겁니다.”
건너다본 내부의 모습은 가히 가관이었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양반다리를 한 이의 앞에 기가 죽은 소동물들이 쩔쩔매고 있었다. 어떻게든 晰 를 설득해 보려고 곱게 지어진 한복을 펼쳐 이리저리 들고 결과 색깔을 뽐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한양에서 유행하는 옷이라며 한 번만 입어보시라고 비는 이도 있었다. 온 산의 신선들이 모여 좋은 의복이란 다 가져온 것만 같았다. 이미 그들을 제외하고도 많은 이들이 다녀간 것인지 한쪽에 쌓아둔 옷의 가짓수만 해도 오십은 넘는 것 같았다. 補 은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를 데려온 이유가 좋아해서…. 단순히 그뿐이었구나. 마음에 드는 의복이 없어 자기를 이레간 방치해둔 거였구나. 수호신이라는 자가 저리 잔소리를 하며 우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補 은 어쩐지 그가 귀엽게 느껴졌다. 성이 찰 때까지 바닥에 누워 생떼를 부리는 아이와 다를 바가 있나? 드러눕지만 않았지. 補 의 눈에는 역시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 晰 가 꼭 어린아이와 같아 보였다. 晰 가 일주일간 신선들을 못살게 군 것은 결코 잘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노력하는 모습이 그의 마음에 든 까닭도 있었다.
그때, 안쪽에서 열심히 晰 에게 다른 옷을 보여주던 너구리 신선이 허, 하며 숨을 급히 들이켰다. 문밖에 서 있던 補 을 발견한 것이었다. 晰 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인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補 과 시선을 마주했다. 晰 는 토끼 눈을 하고서도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자세를 고쳐 앉고서 헛기침을 했다. 방금까지의 일을 무마하고자 목소리를 가다듬는 듯했다. 그를 본 補 은 작게 숨처럼 웃음을 흘렸다. 인제 와서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그는 일전의 상황을 다 보았으니 말이다. 補 은 천천히 방으로 들어서며 말문을 열었다.
“아랫사람이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혼을 내시면 어찌합니까?”
“아니, 나는 그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내가 바라는 바를 제대로 지키지 않으니 이러는 게 아니겠느냐.”
晰 는 체면을 차리려고 했다가 오히려 역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補 이 자신을 나무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晰 의 둥근 호랑이귀가 한 번 쫑긋하고서 섰다. 그의 날카로운 동공이 동그랗게 확장되었다. 晰 에게 자신이 들고 온 옷을 보여주던 토끼 신선은 상황을 파악하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이내 몸을 물리고서 얌전히 옷을 개고 있었다. 晰 가 補 을 해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는 한편,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몸을 사리는 거였다. 補 은 그런 신선들을 잠시 돌아보다 다시 晰 를 바라보았다. 補 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차마 거부하기 힘든 힘이 실려 있었다.
“제가 보기에 옷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제게 아무런 언질 없이 바람맞힌 건 晰 님이 아니신지요?
晰 는 잘 보이고 싶었던 사람에게 못난 꼴을 보이자 억울한 한편, 이런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補 에게 혼나는 모습을 신선들에게 보여줘서 부끄럽다기보다는 補 의 말이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補 의 말대로 옷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모든 것에 있어 완벽에 완벽을 기하려고 하니 무엇을 보든 晰 의 성에 찰리가 만무했다. 晰 는 자신의 행동이 補 에게 있어 난감하고도 불편했을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야 補 에게는 이곳이 낯선 곳이 아니었나.
晰 는 補 의 기분을 살피고자 시선을 곧게 마주하고서 補 의 안색을 살폈지만, 그의 기분을 쉽사리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옅게 띈 미소와 침착한 말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晰 는 남의 기분을 살펴가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몰상식한 신이 아니었다. 그는 곧 시선을 아래로 낮추고서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사과였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저를 좋아한다면, 다음부터는 그냥 오시면 돼요.”
옆에서 이들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던 신선들은 뒤바뀐 장내 분위기에 차마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있었다. 근엄한 신의 면모를 보여주려 했던 자는 오히려 주눅이 들어 사과를 하고, 신부로 들어온 이는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해 주고 있으니 晰 를 오랫동안 봐온 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놀라고 만 것이다.
하지만 천성이 약자인 그들은 補 이 먼저 晰 에게 등을 내보이며 방을 나설 때까지도 혹여 補 이 잘못될까 싶어 덜덜 떨고만 있었다. 晰 는 자신을 두고 유유히 방을 나서는 補 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며 눈매를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補 이 속으로 이 어리숙한 신을 옆에서 보좌하고 책임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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