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타입 | 10,000자 샘플입니다. | 제가 애정하는 분의 샘플이에요! 작업 맡겨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In bed, illness.
¶ RFRH
R.F
R.H
01.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 속담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른 새벽,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H이 자신의 상태를 감기라고 판단 내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요 며칠 스트레스에, 철야에, 카페인 과다까지. 하나만 있어도 충분한 요소를 한꺼번에 견디자니 몸이 허해질 만도 했기 때문이었다. 퍽 논리적이고도 그럴듯한 인과였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사람 마음이 어찌 항상 이성적이고 객관적일 수가 있을까. H은 며칠 전 일을 상기하면, 아직도 부아가 치밀었다. 고작 며칠 밤이나 지샜다고 면역력이 이런 식으로 바닥날 거면…, 내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몸이 알아서 적응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론 과로하는 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래, 물론 나쁜 생활 습관이 잘났다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지만…, 일이 이렇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이번엔 작업을 뒤늦게 몰아서 한 것도 아니었단 말이야……. 너무 억울해. 원래 일정에 비해 작업도 빨리 시작했는데. H은 망가진 생활 리듬으로 몸이 제구실을 못 할 때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면서 왜 고작 며칠 사이에 몸이 이렇게 약해지냐는 불평을 머릿속에 줄줄 늘어놓곤 했다. 그 불평들이 변명이라고 할지라도, 이번만큼은 예외적으로 정말 H의 잘못이 아니긴 했다.
“아…….”
어째 지난번 열감기로 앓았을 때보다 더 아픈 것 같아.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손오공처럼, 있지도 않은 긴고아가 머리를 세게 옥죄는 기분이랄까. 포테이터 라이서에 꽉 낀 감자처럼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온 힘을 다해 눌러서 H, 그 자신도 삶은 감자 같이 으깨질 것 같았다. 파편으로 조각조각. 은색, 그 반짝이는 철제에 속절없이 짓눌려 곤죽이 된 노란 감자가 H의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내가 그렇게 될 리는 없는 거지만……, 그만큼 아픈 것 같은데. 어쩌면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몰라…. 현실적으로 절대 일어나지 않을 생각이나 혼자만의 대화를 뇌까릴 만큼, H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헛된 망상과 둔탁한 고통이 H의 머릿속에서 화려한 콜라보를 이루는 셈이었다. H은 둔해지는 사고를 따라 넋을 놓고서 멍해지고 있었다. 저번 감기보다 더 아픈 것 같다는 H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은 듯 방금까지 H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짜증이 열감에 녹아 한 꺼풀 꺾여 내려갔다. 초점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H의 시선이 저 멀리 허공을 건너다보자면, 몸이 따로 노는 것처럼 H의 손이 느릿하게 올라 제 이마를 더듬었다. 열 오른 이의 손이 자신의 체온을 제대로 인지할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지금의 H이 느끼기에는 아마도 추운 것 같았다.
여기서 H의 건강 상태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파고들자면, H는 근 닷새간,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고용인의 외주를 해치우느라 며칠 밤을 새하얗게 불태운 참이었다. 그 덕분에 지금 보이는 것처럼 H의 몸도, 마음도 전부 엉망진창인 상태에 봉착한 셈이었다.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아니, 이전 것이 더 깔끔한 느낌이네요. 음, 역시 아니에요. 제가 깔끔했으면 좋겠다고 했지, 이건 너무 단조롭고 무난하잖아요. 자간도 이전 것이 훨씬 낫네요. 다시 수정해주세요. H은 가뜩이나 아파서 정신이 없는데, 앵앵거리는 그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리는 것 같아 고개를 내저었다. 아, 머리가 흔들리니 이젠 어지럽기까지 했다. 정말 가지가지네. H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생겼다.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되는 수정 요청-그래봤자 시간만 소요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과 나쁜 감정만이 듬뿍 담긴 고용주의 불평불만에 웬일로 넉넉하게 시작했던 작업은 결국 마감 기한이 다 되도록 질질 끌어야만 했고, H는 마감 기한 당일엔 정말 쫓기듯 일을 마무리해야만 했다. 이렇게 보면, H의 잠이 줄어드는 것은 참 당연한 일이었다. 사그라든 것 같았던 분노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 H의 두통에 박차를 가했다. H은 지끈거리는 고통에 고개를 숙이고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느릿하게 감은 눈을 따라 숨처럼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으……, 지금 몇 시지…….”
잠들기 전, 충전기와 연결해둔 휴대전화가 H의 오른편에 놓여있었다. H는 눈을 감았던 것만큼이나 굼뜨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선 전화기 액정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백색광을 내뿜는 액정에는 AM 5:36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어쩐지 어둡다고 했어. 틈 하나 없이 닫힌 창문과 그 위를 덮은 커튼. 약하게 틀어놓은 에어컨을 따라 흔들리는 시폰 커튼 사이로 가로등의 희끄무레한 불빛 하나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이 방에 존재하는 빛이라고 하면, H의 휴대전화와 그리고 방 문틈 사이로 얼굴을 비춘 거실의 조명뿐. 그 연노랑의 얇은 줄기가 침대 위로 길게 드리워 있었다. F가 일어날 시간이구나. 벌써 그만큼 된 건가. 조용히 화를 내고, 또 그만큼이나 빠르게 사그라든 감정이었건만, 어찌 된 게 감정은 소비한 만큼 H를 노곤하게 만들었다. 몽롱하게 자리한 정신을 따라 육체는 흐느적, 이불 아래 녹아 힘이 배로 빠져나갔다. 여름이니만큼, 그 두께도 얇은 이불이건만 H는 어쩐지 도톰한 솜이불에 깔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H는 이 답답한 무게에 짓눌려있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02.
근 닷새, H의 책상엔 커피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잔과 고카페인 음료 캔들로 쌓은 탑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었다. F는 전날 치웠어도 금세 더러워지고 마는 H의 책상을 바라보자면, 이러다가 H가 다시 쓰러지지는 않을지 골머리를 앓았다. 휴지나 과자봉지 따위의 쓰레기들로 책상이 더러워지는 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괴상한 성격의 고용주에게 잘못 걸려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몇 번이고 작업물을 갈아엎는 H를 보면, 가히 언어적인 표현으로는 다 소화하지 못할 만큼 속상했다. 그래서 F는 H에게 잠은 좀 잤어? 라며 말을 걸곤 했지만, 그날 밤에도 H의 방에 불이 꺼지지 않은 건 진작 알고 있었다. F는 자신이 걱정하고 있다는 걸 자신의 태도를 통해 알릴지언정 구태여 잔소리를 얹지는 않았다. 지켜보는 자신도 속상하지만, 당사자인 H는 얼마나 답답하고 화가 날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F는 그렇게 보다 현명한 대안을 택했다. 깊어지는 새벽, 찔레꽃의 이파리가 한결 물러간 더위에 흔들리는 시간. H에게 시원한 카밀러 티를 건네주며, 그 시간을 곁에서 같이 보내주는 식으로.
그러고 보면 F가 H에게 일을 미리 해두는 건 어떠냐며 잔소리를 길게 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미리미리 조금씩 해둬야지, 라고 생각해도 일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고, 미뤄둔 일을 한 번에 해치울 때 분비되는 도파민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기에 H의 오래 묵은 습관을 고치기란 영 어려웠던 탓이었다. H는 이번에도 누적된 피로를 풀려는 듯 한동안 일찍 잠자리에 들고 있었다. 이젠 고장 난 에어컨도 고쳤겠다. 이번 주까지는 우선 푹 쉬어야겠어. F는 H가 잠들기 전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여름에는 해가 길어지기 마련이라, 곧 해가 뜰 시간이었다. F는 H가 깰까 싶어 되도록 출근하기 직전에만 문을 열어 H가 잘 자는지 확인하곤 했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F는 출근 준비를 다 끝마치기도 전에 H의 방문을 슬쩍 들여다보고 싶었다. 새로 갈아입은 셔츠의 소매를 반쯤 접어 단추를 끼우던 F는 조금 열린 H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직사각형의 샛노란 빛이 H의 방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H는 문득 자신의 방을 가늘게 비추던 빛마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F가 불을 끈 모양이었다. 벌써 출근한 건가? 나가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H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노라면, H의 추측과는 달리 그의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 얼마 전 윤활유를 발라두어 부드러워진 경첩 덕에 끼익하는 소음 하나 없었다. H는 제 방문이 열리는 걸 보면서도 당연히 이어져야 할 다음 사고로 넘어가지 못했다. F가 출근했다면, 이 문을 여는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말이다. H의 사고야 어찌 되었든 F는 아직 집을 나서지 않았으니 H의 방문을 연 이도 F였다. 문틈 사이로 고개를 들이민 F가 H과 눈이 마주치자, 눈가에 부드러운 호선을 덧그렸다. H가 이렇게 일찍 일어날 줄은 몰랐던 F는 다소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제 연인과의 아침 인사엔 여지없이 미소가 피어나는 것이다. 다만 그 연인의 반응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어딘가 아픈 것이 분명했다.
“……H, 너 괜찮은 거야?”
F가 H의 방으로 한 걸음 들어서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H는 인과관계와 비롯한 모든 이지를 내려놓고서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이를 망연히 응시하기만 했다. 기실 시각과 지각은 간혹 별개의 감각으로써 작동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금의 H이었다. F의 간단한 질문에도 H의 대답이 쉬이 돌아오지 않자, F는 H가 놀라지 않도록 속도를 유지한 채 빠르지만 그렇다고 서두르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H의 곁에 다가섰다. F의 손바닥이 H의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고 위로 들어 올렸다. 저들끼리 뭉친 얇은 타래가 F의 손가락 위로 걸려 굴곡이 졌다. 뜨거워. F는 제 체온보다 훨씬 높은 H의 체온에 흠…, 작게 소리를 냈다. 무리하더라니 결국엔 앓아눕겠구나 싶었다. H는 제 이마를 덮은 F의 손바닥이 시원해 눈을 편히 감고는 그의 손에 기대었다. F는 그게 꼭 어리광처럼 느껴져 귀여우면서도 애틋했다. 희미하게 올라선 입매와는 반대로 눈매는 아래로 기울었다. 미세하게 주름진 눈매가 그의 근심을 보여주는 듯했다.
“어……. 언제 온 거야, F? 아까 출근하는 것 같았는데…….”
H은 제 열기가 F의 체온에 동화되도록 몇 분간 기댄 후에야 겨우 얼빠진 소리를 내며 F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H는 처음 자신이 일어나 몸을 일으켰던 것에 비하자면, 이미 제 몸을 깔아뭉개고 있는 이불과 함께 침대 헤드에서 미끄러져 도로 반쯤 드러누운 상태였다. 날개뼈 아래쪽이 애매하게 들려 딱딱한 나무판에 기댄 목이 아플 텐데, H은 별다른 투정도 하지 않았다. 아마 자신이 불편하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 정도 열이면, 38℃는 넘는 것 같네. 손대중으로 H의 체온을 가늠하던 F의 낯에는 어느덧 차차 미소가 사라지고 진중함이 떠오르고 있었다. 정확한 체온을 재고 해열제를 먹여야겠다고 판단 내린 F는 제 손목시계를 한번 내려다보고선 이럴 때를 대비해서 아껴둔 연차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연말에 H와 쓸 휴가 날짜도 미리 받아두었고, 그때 사용할 연차도 아직 몇 회 남았으니 나름 넉넉하게 계산해둔 덕이었다. F는 H를 보고서 다시금 옅게 미소를 덧그렸다. H의 질문에 대한 F의 대답은 그리 늦지 않게 이어졌다.
“깜빡 잊은 게 있어서 다시 들렀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일이 별로 없는 모양이야. 이런 때에 연차 쓰고 연이 간병해야지. 아니면 또 언제 그러겠어?”
상대를 배려한 화법. 혹여 H이 자신에게 너무 미안하지 않았으면 하는 F의 배려가 듬뿍 담긴 문장들이 차례로 이어졌다. F의 배려에 맞게, H의 병증에 맞게. H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긍정을 표했다. 응, F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 낌새였다. F는 H의 가슴께까지 올라온 이불을 아래로 끌어내리며 H의 왼편으로 조금씩 밀어내었다. H의 열을 가라앉히려는 첫 번째 시도였다. H은 마침 딱 안락하게 좋았던 걸 F가 방해하자 미간을 좁혔다. H은 제 손을 뻗어 이불을 더듬거리더니 곧 자신의 쪽으로 이불을 끌어오려고 했다. F는 그런 H의 손을 조심스레 잡고서 나지막이 말했다.
“H아, 너 지금 열이 높아서 조금만 참자. 이따가 열 내리면 다시 덮게 해줄게.”
다정다감하게 타이르는 음성이 H의 귓가에 울렸다. H의 귀엔 F의 목소리가 동굴에서 퍼지는 메아리처럼 여러 번 공명하고 있었다. H은 작게 끙,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작게 뒤척였다. F는 H의 옆으로 도로 이불을 치워두고서 다시금 H에게 말했다. H은 자신의 상태를 F에게 명확히 표현하지도 않았건만, F는 그조차 이해한다는 듯 아까보다 한 톤 작아진 목소리로 H에게 속삭였다.
“고마워, H. 죽 끓여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우리 아침 먹자.”
03.
한동안 보글거리는 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H는 그조차 눈치챌 여력이 없었던 터라 여태 흐려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아득히 천장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가만 천장을 주시하고 있노라면 불 꺼진 조명에 흐릿하게 비친 거실이 아지랑이처럼 번져 보였다. H는 그 실루엣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었지만, 별다른 사념이 들지는 않았다. 일렁거리는 상을 따라 시선을 보내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생각까지는 이어지지 않는. 그저 감상 없이 무미건조하고도 열띤 관람이었다. H의 적적한 관람은 그 뒤로 30여 분간 이어졌지만, H, 그 자체는 시간의 흐름과는 무색하게 동떨어져 있었다. 옆으로 치워진 이불. 그 위에 시체처럼 미동 없이 올려진 손. H는 이 모든 게 자신을 두고 홀로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아래로 끌어당기는 중력을 따라 가만히 숨죽이자면, 선명하게 느껴지는 감각은 죄 추위뿐이었다. H는 몸을 잘게 떨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이불을 움켜쥐어 자신의 쪽으로 끌어온 H는 제 가슴께까지 도로 덮어내고 나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눅진눅진한 열감에 녹아내린 H는 제풀에 지쳐있었다.
F는 뜨거운 죽을 어느 정도 식혔다고 확신이 섰을 때, 죽과 해열제, 미지근한 물을 챙겨서 H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그전까지도 계속 H의 방에 들어와 얼굴을 비추었지만, H은 기억이 뭉뚱그려져 F의 존재가 희미하게만 느껴졌다. H의 의식이 온전할 때를 계산하자면, H의 불완전한 정신으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다. F는 방에 들어올 적마다 H이 끌어올린 이불을 아래로 내리고, 나중에는 아예 의자 위로 치워버리기까지 했는데 H은 그게 몹시 서러웠다. 열이 올라 벌게진 피부 위로 눈물이 몽글 맺힐 때면, F는 H이 속상해서 눈물을 내는 것인지. 혹은 생리적인 눈물일지 구태여 구분 짓지 않았다. 그저 손을 들어 H의 눈가를 톡톡, 닦아주며 아이 달래듯 어를 뿐이었다. F는 H을 조심스레 등받이에 기대게 앉히곤, 의자에 올려 둔 이불을 아예 옷장에 넣어두었다. 뒤에서 H의 눈초리가 느껴졌지만, F는 짐짓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F는 죽을 한 숟갈 떠서 수저의 볼록한 밑면을 제 손잔등에 대어 얼마나 뜨거운지까지 가늠했다. F는 하얀색 머그잔과 쟁반이 올려진 서랍 위에 그릇을 내려두고서 수저를 H에게 내밀었다. H가 작게 칭얼거리며 F의 품으로 안겨들 때는, F는 셔츠차림이 아닌 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뺨을 스치는 상의가 폴리에스터보다는 보슬보슬한 면에 가깝다는 걸 토대로 H는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옷을 움켜쥐었을 때 얼마나 구겨지는지를 바탕으로 판단 내렸다고 할 수 있겠다. 아무래도 H의 병간호를 위해 옷을 갈아입은 모양이었다. H은 F의 품에 기댄 채로 말이 되지 못한 음절을 웅얼거렸다. F는 그런 H의 알지 못할 말에도 응, 착하지. 작게 대꾸해주며 등을 토닥였다. H은 자신의 입가로 가까이 다가오는 수저를 밀어내려다 곧 포기한 듯 입을 열어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차갑지도, 그렇다고 뜨겁지도 않은. 몇 번 씹지 않고 넘겨도 될 정도로 묽은 죽이었다.
“많이 아프지? 조금씩 열 내리고 있으니까 곧 괜찮아질 거야.”
쉬이-, 어린아이 달래듯 이어지는 F의 음성이 너무 따스해서 H는 손가락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는데도 F를 놓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붙어있으면 열이 더 오를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들지도 않았으니,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구는 거였다. H의 눈꼬리를 타고 맺힌 눈물은 쉽게 멎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송골송골, H의 이마에 맺힌 땀처럼 소금기를 지닌 물방울들이 H의 검은 속눈썹에 걸렸다. H가 눈을 깜빡일 적마다 불그스름해진 뺨을 타고 투명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더우면서도 추워. 머리의 지끈거림은 아까보다 나아진 것 같았지만 한 번 열이 올라 진이 빠진 몸은 정신력 또한 갉아먹는 게 분명했다. F에게 이런 약한 모습 내보이기를 꺼리던 H가 어린아이처럼 F의 품에 안겨 그의 체온을 앗아가려 하는 게 그러했다.
“아파, 아파. F……. 너무 춥고 아파. 더워. 더운데 있지……. 너무 추워. 흑….”
H의 입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날 때쯤, F는 체온계를 들어 땀에 젖은 H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H의 둥근 이마 위를 가리키는 체온계에 36.9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이대로 0.3℃만 더 내려가면 좋을 텐데……. F는 H의 이마 위에 얼음물을 잔뜩 머금은 물수건을 올려주며 잔잔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순하게 휜 눈매에 비해 깊은 수심(愁心)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이 아파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다. 더구나 F는 자신의 애인에게 가정적이고도 헌신적인 면모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이였다. 그는 H을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로,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었기에 속에서 묻어나는 진심 어린 걱정과 배려, 공감과 이해에 있어 한껏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H이 과로와 스트레스에 지쳐 이렇듯 앓아누울 때마다 F도 그에게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곯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F가 H을 사랑하기에 묻어두는 속사정이었다. 상처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후에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커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F는 충분히 자기 의사를 H에게 표현하고 있다고 여겼다. H도 어찌할 수 없는, 이번과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는 괜한 말은 하지 말아야지. F는 사랑 앞에서는 조금 더 조심스러워지는 면이 없지 않았다.
“H, 우리 이대로 조금만 더 버텨보자.”
04.
우리라는 단어, 그 용의를 고려해보자면 단순히 관계 개선 여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F가 더 이상 H을 이해하고 싶어지지 않을 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F는 H과의 관계에 있어 가능하다면 서로 맞추어 나아가는 형태를,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H에게 맞추어 그에게 상처 주지 않는 쪽을 추구했으므로. H도 F의 걱정과 그의 성정을 모르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거라면, F를 위해서라도 조금씩 나아지려 노력하고 있었다. 서로를 위한 변화, 걱정, 감정의 교류. 그것이 이들이 서로를 위해 배려하며 성장하는 연인이라는 방증이었다.
“정상 체온이네. 정말 다행이다.”
나긋나긋하나 그만큼 나직한 목소리였다. H은 새근새근 규칙적이고도 안정적인 숨소리를 내쉬며 눈을 감고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오전 11시를 향하고 있었다. 미지근해진 대야의 물 위로 파동이 일었다. F는 H의 이마 위에 올려 둔 물수건을 옆으로 치워두었다. 참으로 힘겨운 열감기였다. F는 제 얼굴을 볼 사람이 없는데도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해가 뜨자 옆으로 잠시 걷은 커튼 사이로 햇빛이 새어 들어왔다. 꽉 닫힌 창에 바깥바람이 불어오지는 않았지만, 투명한 창에 그대로 비친 뜨거운 햇발이 침대 가장자리를 알랑거렸다. 등을 따갑게 두드리는 햇살에도 F는 군소리 하나 없었다. 다만 품에 안은 H의 머리카락이 혹여 그의 감은 눈을 따갑게 찌를까 싶어 잔머리를 옆으로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H의 곤히 잠든 모습만 보아도 F는 행복했다.
여느 긴말 없이도 사람은 시선으로 많은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F의 눈길은 H의 낯에서 떨어지지 않고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오늘 새벽부터 이어오던 병간호 내내 바라보던 얼굴이었다. 열이 떨어져도 붉어진 피부가 쉬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F는 H가 깰까 싶어 엄지로 뺨을 조심스레 쓸면서도 금세 제 손을 옆에 내려두었다. 팔에 걸쳐진 제 연인의 안정적인 무게. 자신까지 땀에 젖은 듯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꺼진 에어컨 위로 빛이 두어 번 깜빡였다. F는 H를 침대 위로 눕히지 않고서 조금 더 제 품에 안고 있었다. 조금만 더 이대로 H의 단잠이 이어지길. F는 제 연인의 편안한 단잠을, 둘의 안녕을, 다가올 오후에는 건강과 평안을 기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