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y Sky Blue Star 死の境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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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샘플

死の境界

2023. 02. 05 작업물입니다. 항상 믿고 맡겨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폭탄 테러와 관련된 소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 바랍니다.


 

死の境界

 

 

 

Cast. F & R

 

 

 

 

 

 

01.

 

 죽음과 삶은 반대되는 개념이나 공존하기에 생은 찬란하며 비루했다. 인간은 생이 귀하다는 걸 항상 죽음을 통해 알았다. 한순간 스치는 찰나에도 의미를 부여하여 아름답게 융화시켰다. 누군가의 삶 속에 잠시나마 머물다 이내 아주 떠나버리고 마는 삶. 우리는 이렇게 가지만, 그리하여 미화된 기억 속에 망자를 품는 이가 있다면 그들의 육신은 재가 되어 삭아버린 지 오래되었다 해도 무관했다. 타의 이견도, 이유도 필요치 않았다. 그렇게 이미 끊긴 이의 명줄을 손에 틀어쥐고 있자면, 나뭇가지에 걸려 바람에 나부끼는 연줄을 보듯 투자하는 모든 시간은 무의미하게 그들을 우롱했다. 누군가 안부를 전하며 흔드는 허연 손수건처럼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마저도 남은 이를 서글프게 했다. 그리 뒤돌아보는 이 없이 무가치를 논해도 어찌 사람이 매번 득이 되는 일만 할 수 있을까. 때론 부질없는 이 과정들이 생자에겐 큰 위안이 되곤 했다. 생전의 유기(有機)란 망령이 된 순간부터 변질하기 마련. 떠난 자는 말이 없으니 아무래도 좋지 않겠는가. 그들을 기억하는 방향성으로 만물의 영장은 슬픔을 흘려냈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친구. 누군가에게는 하나뿐일 가족. 누군가에는 잊지 못할 배반자…. 누군가에겐 살아야 할 이유로써.

 

 F의 삶은 다른 이들에 비해 다면적으로 죽음과 맞닿아 있었다. 그가 이제껏 놓쳐온 이름과 그가 여태 손에 움켜쥔 실낱의 수만 하여도 그 얇고 허연 것들이 거미줄처럼 뒤엉켜 눈앞이 캄캄했다. 한 치 앞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먹먹해 깊은 산새의 뿌연 안개가 도시의 스모그를 반기는 기분이었다. 화산재가 눈앞을 아득히 가려 먼지투성이가 되어서도 그를 인지하지 못하는 맹인처럼 F는 자신의 사명을 상기했다. 일부러라도 두려움을 저만치 밀어두었다. 창문 밖으로 뿌옇게 피어오른 먼지가 그를 반겼다. F는 문을 열고서 밖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래, F가 보는 하루는 그러했다. 그가 공안 경찰로 하루를 보내든, B란 이름으로 시간을 축이든 그의 하루는 종종 탁한 오수에 잠겨있고는 했다. 수많은 사람의 드높은 비명과 자비 없이 뒤섞인 사이렌 소리가 그의 귓등을 사정없이 때려대었다. 듣는 이를 고려하지 않은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짙푸른 창공이야 어떠하든 생의 순환을 재촉할 뿐이었다.

 

 

 

“아….”

 

 

 

 F의 벌려진 잇새로 작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곧 끊기기라도 할 것처럼 옅어진 숨결이 그의 목소리를 좀먹어가고 있었다. F의 손이 차 문을 으스러뜨릴 듯 움켜잡았다. 자욱하게 내려앉기 시작하는 분진 사이로 F가 문을 세게 밀어 닫아내었다. 무너져 내린 건물의 파편이 대피하는 사람들의 앞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테러리스트들이 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일을 대놓고 계획했는데 아무도 몰랐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오늘 오전의 일부터 상기하자면, F가 조사 중이던 일과 연관 있는 자들의 소행이었다. 새로운 단서를 잡았다며 이른 새벽부터 급습을 준비하고 있었던 게 무색했다. 자신을 보며 여유롭게 웃던 이의 낯짝이 생각나 F는 불현듯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젠장, 거짓 정보나 뒤쫓고. 보기 좋게 함정에 걸려든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다. 이를 꽉 문 탓에 F의 턱 위로 근육이 두드러졌다.

 

 뼈대를 훤히 드러낸 건축물을 보자면, 내부 상황을 살피지 않아도 원체 상황이 좋지 않아 원래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던 건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건물의 한쪽이 완전히 폭삭 내려앉아 있었다. 폭탄 테러…. 언제나 마음속에 품되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던 이들의 이름이 F의 혀끝에 맴돌았다. 마지막이 되어버린 그날의 친우 모습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F F는 머릿속에 피어나는 잡념을 털어내듯 이내 고개를 재빨리 내저었다. 이렇게 얼빠져 있을 때가 아니잖아. 회색의 정장은 설진(屑塵)이 내려앉아도 꼭 그조차 자기 것인 마냥 티가 나지 않았다. 한차례 사풍(沙風)이 일어 그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휘날렸다. 제법 길이가 긴 탁한 금발이 그의 눈가를 문질렀다. 이리저리 복잡하게 널린 잔해의 틈새로 F가 서둘러 발을 디뎠다. 그의 허리춤에서 지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무전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아까부터 무전은 나오고 있었건만, 웅성대는 소리에 묻혔던 걸지도 모른다.

 

 

 

   “추가적인 폭발물 발견 시 진입을 중단하고 무전 바랍니다.”

   “확인했습니다. 구조 재개합니다.”

 

 

 

 2차 붕괴를 예상하여 잠시 몸을 피해 있던 구조팀이 하나둘 반파된 건물로 진입을 재개했다. 편두통 때문일지 연신 지끈거리는 머리에 F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매캐하게 코를 찌르는 탄 냄새가 바람에 물씬 실려 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건물로 연결되는 수도관까지 터져 박살 난 콘크리트 사이로 얇은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F의 구두가 흙탕물에 빠져 짙게 얼룩이 졌다. 하필 토요일에 백화점이라니…. 운 좋게 나온 사람들은 그렇다고 쳐도 내부에 갇힌 이들이며 희생자들이 많을 게 분명했다. 임시로 세워둔 대책본부 텐트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F는 상황을 가늠하듯 텐트 주위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곧 F의 신원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인지 헬멧을 쓴 경찰 한 명이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F는 제게로 접근한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제 재킷 주머니 속의 경찰 배지 홀더를 꺼내 내밀어 보였다. 경찰이 고개를 까딱이며 확인했다는 사인을 보내자 F는 곧장 가까운 텐트로 들어섰다.

 

 

 

   “아니. 대체 일 처리를 뭘 어떻게 하면 일이 이렇게 되는 겁니까? SAT며, 원…. 피 같은 국세는 다 누구 입으로 들어가는지.”

   “어쨌든 이 사건은 저희 관할은 아닌 겁니다. 지원은 해드리겠지만, 여기 말고도 복잡한 사건이 많아서요. 저희 쪽은 지난해에 감축이 들어가서 인원이 적은 거 아시잖습니까.”

   “아이고, 잘나셨네요. 그럼, 뭐. 이쪽은 안 바빠서 이러고 있답니까?”

 

 

 

 브리핑 좀 들으려고 했더니.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도 어디를 가든 잘잘못을 따지며 음성을 높이는 이들이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애매하게 관할이 겹치는 곳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지금처럼 2배, 3배로 입들이 많았다. 부하들은 아직 다 도착하지도 않았지, 거짓 정보를 흘린 녀석을 잡는 데에만 오늘 오전을 통째로 날렸지. F로서는 저들이 앞에서 노닥거리고 있지 않아도 충분히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F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푸른 눈동자가 총기를 담은 채 예리하게 빛을 발했다. 제 기분이야 어찌 되었든, 사안이 사안인지라 신속하게 해결해야만 했다. 오전에 잡아 온 놈도 신문해야 하는데, 1분 1초가 아까운 실정이었다. F는 여러 서류가 낭자하게 널려있는 책상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테이블을 둘러싸고 제 한탄만 늘려놓고 있던 경시청 간부들이 뒤늦게 그를 돌아보았다.

 

 

 

   “…지금이 이럴 때입니까. 현 상황 보고부터 듣죠.”

 

 

 

 

 

 

 

 

 

02.

 

 R은 언제부터인지 자신이 눈을 감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쇳덩이라도 올린 듯 무거운 눈꺼풀을 찬찬히 들어 올리자면 무언가 속눈썹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이게 뭐지? 어딘가에서 물이라도 떨어지고 있는 걸까. R은 다시 스르륵 감기는 눈꺼풀에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입술이 건조하게 말라 따갑게 느껴졌다. 그뿐만 아니라 까슬까슬한 무언가가 피부에 잔뜩 묻어 생채기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고통이든 촉감이든 정확히 인지하고 나서야 확연히 느껴지지 않나. R은 차가운 바닥에 놓인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만져보려고 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팔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을 움직여 보려고 시도한 끝에야 겨우 검지를 까딱여 딱딱한 바닥을 한 번이나마 두드릴 수 있었다. 아, 그래서 대체 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누워있는 거야. 나는 분명…. R은 목이 타는 듯한 갈증에 입술을 꾹 다물고 타액을 삼켜내었다. 혀조차 바싹 마른 탓에 입안에 씹히는 모래알만 삼킨 꼴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잘게 기침을 하자면 두가 울려서 으으, 하는 신음만이 흘러나왔다. 더구나 자신이 두 발로 온전히 서 있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자면 어쩐지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R의 길게 늘어뜨려진 머리카락 인근에서 짧게 알림이 울렸다. 폭발에 휘말리면서 마네킹에 머리를 부딪친 R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가 어려웠다. 방금 들린 음의 위치가 왼쪽이었는지 오른쪽이었는지조차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안검(眼瞼) 위로 흐르는 액체가 물보다 점성이 높아 제법 묵직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피가 나는 것 같아. 제 상황이 좋지 않다는 생각에는 그보다 한 박자 늦게 도달했다. R은 눈을 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역한 어지럼증이 일었다. 육신은 바닥에 붙어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R은 자신이 넘어지면서 어디에 머리를 박았다고 판단을 내렸다. 가벼운 뇌진탕과 더불어 반고리관이 흔들려 R의 세상은 쳇바퀴마냥 빙그르르 돌고 있었다. 둔해진 신경 덕에 R은 통각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대충이나마 이 정도에서 피가 흐르려면 이마가 찢겼거나 두피가 찢겼겠거니 유추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곧 자신의 오른 이마에 자리한 흉터로 닿았다.

 

 눈을 뜨지 않으면 온통 어둠이었다. 어둠이란 인간을 자그마한 상자 속에 가둬놓고 그 끝이 어디인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자고로 태초의 인간조차 암흑을 두려워했으니 그 공포가 현대까지 전해지는 건 후생학적으로, 본능적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R은 밀려오는 공포에 속절없이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어둡다는 이유뿐 아니라,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도 그의 불안감을 배로 부가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R이 아직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눈을 뜨면 밝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나? 차라리 그런 단순하고 근시안적인 희망을 되씹으면 한결 마음이 편했다.

 

 R은 강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짧게 숨을 불어내었다. 제 입가 근처에 있는 분진이라도 일단 날려내자는 심산이었다. 아까 입안으로 들어온 모래알이 혀 위에 달라붙어 물기 하나 없는 점막을 긁어내고 있었다. 영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호흡부터 제대로 확보하고 나면 상황이 나아질지도 몰라. 침착하자, 류 R. 조금만 있으면 이 어지럼증도 한층 덜해질 거야. 그러고 나면 눈을 떠서 자신의 위치 파악부터 해야겠다고, R은 차근차근 순서를 정해나갔다. 조급하게 굴지 말자. 난 괜찮을 거야. 생각은 그렇게 해도 눈가가 시큰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R은 힘겹게 몸을 뒤척였다. 몸을 뒤집는 것까지는 불가능했지만, 고개가 옆으로 비스듬히 돌아가 왼쪽 눈이 눌리는 건 막을 수 있었다. R은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셔 심호흡했다. 괜찮아. 그래, F가 날 구하러 올 거니까. 생각의 흐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자신을 위로하다 보면 문득 소중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고, R은 기저에 깔린 F가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는 확신을 의식의 표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발갛게 열 오른 눈가에도 R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F가 날 구하러 올 거야,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떠올린 것만으로 이 순간이 마지막이 될지라도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처음 휴대전화 알림이 울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밝고도 청량한 음이 R의 숨소리만이 자리한 공간을 일깨웠다. 마인드 컨트롤을 열심히 한 덕분인지 R의 맥박은 아까보다 한결 안정적이었다. 소리는 그래, 오른쪽에서 들렸어. R은 어깻죽지부터 손끝까지 차례대로 힘을 불어넣어 소리의 근원지로 손을 뻗어보았다. 손톱에 닿은 액정은 절반 정도 박살이 난 것 같았다. 날카로운 가시가 R의 여린 살갗을 찔렀다. 따끔한 감각이 미세신경을 타고 찌르르 전기가 흘렀다. 이제 슬슬 통각도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R은 깨진 액정을 더듬어 휴대전화의 굴곡을 찾아가고 있었다. 휴대전화의 완만한 골격이 R의 손바닥 안으로 들어왔을 때쯤 다시 음이 울렸다. 아, F구나. 그래, 오늘은 토요일이니까. F가 퇴근하면 같이 데이트라도 할까 해서…. 차차 기억이 돌아오자 R의 호흡이 떨렸다. 날카로운 파편을 털어내듯 휴대폰을 뒤집은 R은 잠시 제 손을 그 위에 올려두었다. 이마 선을 따라 욱신거리는 통각이 R의 움직임을 늦추고 있었다.

 

 R은 떨리는 숨을 크게 내뱉었다. 입가에 붙은 미사(微沙)가 입김에 떨어져 나갔다. R은 고된 노가다를 한 사람마냥 뻣뻣해진 근육을 외면하고서 제 왼손을 들어 자신의 눈가를 느릿하게 닦아내었다. 그래도 상처가 생긴 건 그리 오래되지 않은지, 피가 미끄러웠다. 눈꼬리를 타고 진득한 액체를 밀어내면 눈을 뜨기가 전보다 퍽 쉬웠다. 가늘게 뜬 시선이 곧장 천장을 향했다. 흐릿한 상에도 건물이 상당히 내려앉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성인 여성이 허리를 굽히면 겨우 설 수 있을 정도는 되어 보였다. 봄맞이 옷이나 좀 보려고 했더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다색 눈동자는 좌우로 굴러 제 주변을 살폈다. 전깃줄은 끊어져 스파크가 튀고 있었으며, 자신이 있던 곳은 꽤 구석의 후미진 곳인지 오른쪽에 구겨진 벽면이 보였다. 기둥은 반쯤 휘어 있었지만, 왼쪽 천장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 가판대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여기 사정이 더 좋은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R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를 들어 자신에게로 끌어왔다. 자신에게 가해진 충격이 버거웠는지 연신 깜빡이는 화면은 부서진 파편 사이사이마다 푸른빛이 돌았고 언뜻 자색도 난자하게 뒤섞여 아롱거렸다. R은 화면 위로 자신의 엄지를 꾹 눌렀다. 잠금 화면이 열려 F F의 문자가 R의 투명한 눈동자에 비쳤다. F가 R이 의식을 잃었을 때에도 연락했는지 부재중 전화도 여럿 있었다. R은 액정이 나가 드문드문 보이지 않는 문자 내용을 위아래로 드래그해 하나하나 일일이 확인했다. 곧 그는 자신이 아픈 것도 잊은 채 작게 웃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회색 콘크리트 가루가 R의 얼굴을 잔뜩 뒤덮어도 유한 호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맑은 눈만큼은 가려내지 못했다. R의 눈가에 옅게 주름이 졌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웃음이 난다는 게 R 스스로도 참 신기했다.

 

 

 

   [ R, 어디야? ]

   [ 설마… ワスレナグサ 백화점은 아니지? ]

   [ R…, 확인하면 꼭 연락해줘. ]

   [ 사랑해…. ]

 

 

 

 

 

 

 

 

 

 

03.

 

 F는 휴대폰이 보내는 작은 진동에 황급히 화면을 확인했다. 확장된 동공이 푸른 눈동자를 좀먹어갔다. 발신자는 R이었다. [ 난 괜찮아. 2층 왼쪽 비상구에 있어. 있지, 사랑해. ] F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곧장 R에게 답을 보냈다. [ 곧 갈게, R. ] 명료하고도 짧은 답이었다. 원래라면 다친 곳은 없어?, 괜찮아? 와 같이 R의 상태를 묻는 말을 여럿 덧붙였겠지만, 이번만큼은 생명과 직결된 문제이다 보니 말보다 행동으로 먼저 보이고자 했다. 그의 옆에서 부하가 현재 구조 상황과 내부 상황을 전달하고 있었다. 2층 비상구. 문만 열 수 있다면 구출하는 건 금방이야. F는 어쩌면 그럴 리가 없겠지만, 자신의 동기들이 R을 도와준 걸지도 모른다는 잡념까지 들었다. 단순히 그렇게라도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F는 R이 답을 주기 전부터 건물 내부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R의 답까지 왔겠다. 다음 행동은 전부 속전속결이었다. F는 마지막으로 안전모를 착용하고서 미리 챙겨둔 구조물품을 손에 들었다. 구조야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니 퍽 익숙한 흐름이었다. 헬멧 아래로 진 음영 속에서도 그의 눈빛은 진중하고도 결연해 선명히 빛을 품었다.

 

 무너진 백화점 입구는 철근이 버텨준 덕에 성인 한 명은 겨우 오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 나 있었다. 들것에 부상자를 실은 구조대가 빠져나오면 F는 곧바로 제 부하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사전 브리핑에서 응급 구조대가 1층 생존자들을 모두 구조 완료했으며, 오른편 비상구 또한 미리 확보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2층 중앙 천장이 무너져 진입이 어렵다고. 진입 전 팀을 나눈 대로 F는 R이 있다고 했던 왼편 비상구를 맡고, 나머지 B팀은 오른편 비상구를 통해 2층 중앙부의 다른 이들을 구조하기로 했었다. 그리고 여건이 된다면 중앙과 왼쪽을 오갈 수 있는 진입로 확보 또한 우선순위에 있었다. 폭발 직후의 건물은 연약한 터라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큰 충격을 가하지 않는 게 기본 원칙이었다. F는 1층 비상구 앞으로 다가가 비상구 문고리를 잡았다. 철컥거리는 소리는 나지만, 열릴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통통, 가볍게 노크하듯 문을 두드리면 뒤에는 빈 공간이 있는 것인지 맑은소리가 났다. 문이 쉽게 열리지 않자 F가 힘으로 밀어내려 했으나 부서진 천장이 가루를 내며 그의 안전모 위로 톡톡 떨어져 내렸다.

 

 

 

   “경부님, 자칫하면 무너질 것 같습니다.”

 

 

 

 부하의 다급한 목소리에 F는 뒤로 물러나라는 듯 팔을 뻗었다. 문이 반쯤 휘어 손잡이를 암만 잡아당겨 봐야 열리지 않을 터였다. 이럴 때는 문의 윗부분을 치거나 아랫부분을 차서 여는 편이 나았지만, 천장은 언제라도 충격이 가해지기라도 하면 곧장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F의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의 반사 신경을 생각하자면 문이 열림과 동시에 안쪽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낙하물이 쌓여도 1층에서 부하들을 대기시키면 금방 치울 수 있을 거야. 불가능하다면 2층 상황을 보고서 반대쪽 비상구로 가면 되니까. 그것도 안 된다면 연이를 밧줄로 고정해서 창가 쪽에 생긴 틈으로 내려 보내면 어떻게든 되겠지. F의 판단은 빠르고 적확했다. 그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말했다.

 

 

 

   “이곳이 무너져 제1 비상구가 확보되지 못하면, 제2 비상구로 돌입한다.”

   “그러면 경부님은….”

 

 

 그의 부하는 F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알면서도 구태여 입을 열었다. 너무 과감하다며 말리고자 꺼낸 말이었다. F는 그런 잔소리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아직 부하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건만, 비상구 문을 향해 돌진했다. 부하들은 모두 붕괴에 대비해 뒤로 물러나며 자세를 낮추었다. 초록빛 문이 천지를 찢을 듯 높은 데시벨의 굉음을 내며 열렸다. F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비상구 쪽으로 뛰어들었다. 이미 크게 금이 가 있던 부분이 떨어져 비상구 앞으로 쌓이기 시작했다. 비상구가 절반쯤 뒤덮여 뽀얗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성인 남성 주먹만 한 타일 쇄편이 F의 오른 어깨 위를 내리치듯 떨어졌다. F의 잇새로 낮은 침음이 삐져나왔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그의 부하들은 저편에서 F를 불렀다.

 

 

 

   “경부님, 괜찮으십니까?”

   “문제없으니 작전대로 진행해.”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뼈에 금이라도 간 듯 의복 아래로 부딪힌 부위가 붓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아도 연신 욱신욱신한 통증이 오히려 F를 더 독촉하듯 앞으로 이끌었다. 문자를 보낼 수 있을 정도면 심한 부상은 아닐 거야. F는 시선을 위로 들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2층 비상구라면 이렇게 큰 소리를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F의 생각대로 R은 잘 움직이지도 않는 육신을 이끌어 어떻게든 2층 비상구까지 와 있었다. 다리에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거의 기어서 반쯤 열린 비상구 문을 비집고 들어온 상태였지만 말이다. 아래에서 들리는 익숙한 음성과 발소리. 착각이 아니라면 분명 자신이 알던 F F의 것이었다. R이 말라 잘 떨어지지도 않는 입술을 열어 음성을 내었다. 끝이 갈라져 듣기 싫었지만 그만큼 물기가 서려 있었다. 어쩌면 지금 R에게서 남은 수분이 모조리 그의 음성으로 간 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F?”

 

 

 

 R이 다리를 질질 끌어 계단 아래로 얼굴을 내밀었다. 곧 아래층 코너에서 먼지가 소복하게 쌓인 검은 헬멧이 형체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 헬멧이 고개를 치켜들자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푸른 눈이 저를 또렷하게 마주 보았다. R은 제 이마를 타고 눈썹까지 적신 혈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말갛게 웃어 보였다. R의 그런 꼴을 보는 F의 마음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말이다. F는 다친 R의 모습을 보고서는 천천히 걷는다는 것도 잊고 한달음에 R의 곁으로 다가왔다. F는 R의 이마를 쓸며 눈썹을 누그러뜨렸다. 이렇게나 다쳐놓고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마터면 널 잃는 생각까지도 했는데…. F는 R의 답을 기다리는 그 시간 동안 제 심장이 얼마나 문드러졌는지 애써 표현하지 않았다. R이 혼자서 겪었을 아픔과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지 F는 예측한다 한들 대신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아, 괜찮아? 말하고 움직이는 걸 보면, 당장은 뇌 쪽에 이상은 없어 보이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바로 병원에 가자.”

   “응, 괜찮아. 막 크게 다치지도 않았고…. 그나저나 큰 소리가 났는데 F는 괜찮은 거야?”

   “소리만 컸을 뿐이야. 우선은 다친 곳부터 확인하고 나가자.”

 

 

 

 R은 옅은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 미간을 슬 좁혔다. F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한 번쯤 생각은 했었지만 이런 식으로 보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을 구한답시고 F가 너무 무리해서 뛰어든 건 아닌지 애틋하면서도 동시에 걱정이 되었다. F는 제가 들고 있던 함을 열어 생수와 하얀색 타월을 꺼내 들었다. R은 무언가 말을 더 꺼내려다가 제게로 다가오는 손길에 순순히 눈을 감았다. F는 그런 R의 얼굴을 물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고서 이내 알코올 솜을 꺼내 상처 위를 톡톡 두드렸다. 둘 사이에는 서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만큼, 그저 이대로 흘려둘 말들도 많았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그래도 있지. 나…, F가 날 구해주러 올 거라고 믿어서 별로 무섭지 않았어.”

 

 

 

 R의 그런 말이 오히려 F의 가슴을 울린다는 걸 알고 있을까. 좀처럼 다스리려고 했던 감정이 F의 맥박을 타고 몸을 축축하게 적셨다. 저릿한 어깨를 비롯해서 전신에 열이 오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B팀이 오른쪽 비상구와 왼쪽 비상구 사이의 진입로를 확보했다면 언제 2층 문을 열고 R과 F가 있는 곳으로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F는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문득 가슴이 벅차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R은 그런 F의 모습이 낯설어 고개를 모로 수굿하게 기울이고서 그의 안색을 살피려 들었다. 쉽게 말해 눈치를 보고 있다는 말이 옳겠다. F는 곧 제 감정을 다스리듯 짧게 숨을 흘려내었다. 그러고는 R의 눈을 마주하며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정말… 사랑해, R.”

 

 

 

 지금 당장으로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이토록 조촐하고도 짧았지만 그렇기에 R은 F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때로는 지독히 긴 문장보다 짧은 어휘 몇 개가 사람의 심금을 울렸으니까. F는 오늘 날짜를 떠올렸다. 2월 6일. 생과 사가 오가는 시일(時日). F는 친구의 기일을 하루 앞두고 R을 잃지 않음에 감사했다. 아무리 그의 생의 전반이 사와 맞닿아 있다고 해도 어떤 아픔은 쉬이 무뎌지지 않기에. F는 지금, 이 순간 제가 사랑하는 이를 눈앞에 두고, 그가 생동하는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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