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마감작.
4,1000자 이상의 장문으로 작업한 자유타입입니다.
원하시는 분위기와 키워드 및 꼭 넣었으면 하는 장면에 대해 말씀하여 주셔서 그 기반으로 작업했습니다.
항상 감사드리며, 좋은 글로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글 내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이니셜화했으며, 나머지 조연은 그대로 넣어두었습니다.
트리거 : 가정폭력, 학대, 방임 등
글의 제목과 목차는 슬라이드 형태로 두었습니다.
1
피부 위를 방황하다 손가락 사이를 파고든 바람은 간혹 연필을 깎을 때, 손끝에 걸리는 칼날의 사늘함과 닮아 있었다. 둘의 차이라고 하면, 하나는 지극히 짧은 찰나일 뿐이지만, 나머지 하나는 그나마 오래 남는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전자와 후자를 가리지 않은 까닭은, 관점에 따라 양쪽 모두 찰나일 수도, 장기간 체류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더 당사자에게 오래 남을지를 결정하는 건 당시의 상황과 그 상황을 직면한 사람의 주관적 견해 차이일 뿐이니.
살다 보면 수많은 견해와 오해. 때로는 몰이해까지도 쌓여갔다. 성장은 그런 견해들을 수용할 줄 알고, 지나쳐 보낼 줄 아는 것이었다. 타협처럼. 합리화처럼. 성장이라는 탈을 쓰고, 끄트머리를 갉아 무뎌지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칼이 필요하다는 걸 P는 알고 있었다. 그전까지 자신의 삶은 칼이 필요할 만큼 모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P는 C를 보면,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C는 제 양손을 허공에 뻗고서 열 개의 손가락을 쫙 펼쳐 보았다. 손샅에 제 몸을 비비며 휘감는가 하면 이내 빗겨나가고 마는 순풍은 C와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누가 잡히고, 누가 도망갈 것인지. 서로의 흔적만 남은 꼬리를 쫓아 돌고 돌았다. C는 바람이 제 손아귀를 빠져나갈세라 재빨리 주먹을 쥐었다. 잡히지 않을 것을 억지로 잡으려 드는 모양새였지만, 무용한 행동을 하면서도 C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듯 헤집고서 멀리 달아나는 바람.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어디든 떠나가는 바람. 시원하고 건조한 연풍이 C의 얇은 옷 사이에 파고들었다. C는 이 시간을 좋아했다. 아침의 푸른 햇살을 맞이하며 기지개를 쭉 켜고는 하늘을 매만지는 시간 말이다. 오늘은 C와 함께 겸상하기 싫었던 건지, 윌프레드 할아버지와 에버렛 할머니는 부엌에 과일이 담긴 바구니만 놓고서 아침 일찍 집을 비웠다. 사과와 복숭아를 하나씩 챙겨나온 C는 수업이 시작하기 전, 짧은 산책을 나섰다.
간밤에 가랑비가 내려 바닥이 축축했다. C는 비가 온 다음 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비가 내린 후의 시원해진 공기는 좋아했다. 수업에 늦으면, 또 그 할아범이 이렇다 저렇다 잔소리나 해대겠지. 바튼-C의 과학 교사-은 별말도 안 하는데 말이야. C는 젖은 흙길을 걸어가며 윌프레드, 그 백발노인의 우산 뼈대처럼 휜 수염에 불이 붙어서 모조리 타버리는 상상을 했다. 붉으락푸르락 열이 올라 성을 낼 영감의 얼굴을 생각하면 고소하다가도 한편으로 불쾌했다.
C의 나쁜 상상은 집에서 두어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주홍색 벽돌집에 가까워지자 점차 멎어 들었다. C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항해하듯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다갈색의 건물이었지만, 지붕이 주홍색인지라 C는 그 집을 주홍색 벽돌집이라고 칭하곤 했다. C는 물에 젖어 갈색으로 물든 길을 따라 달음박질쳤다. C의 발소리를 알아챈 강아지 메리가 꼬리를 흔들며 벽돌집 대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하도 사람을 좋아하는 터라 주인이 대문에 강아지가 머리를 내밀 수 있도록 낸 구멍이었다.
C는 의족을 달지 않은, 멀쩡한 무릎을 굽혔다. 그는 강아지의 고운 털을 결대로 쓸어내렸다. C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역으로 넘겨대는 바람의 손길과는 다른 상냥함이 묻어 있었다. 앞머리가 들려 C의 흰 이마가 훤하게 드러났다. 메리는 헥헥거리며 한쪽 눈을 감고는 C의 손에 제 머리를 비볐다. C의 입에서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못 참을 정도로 간지러운 것도 아니었지만, C는 간지럽다는 이유로 메리의 뺨을 엄지로 살며시 누르며 손을 떼어냈다. 메리가 C에게 다가오고 싶어서 대문에 몸을 비벼댔다.
“저녁에 또 올게.”
철문이 크게 철컹거렸다. 모처럼 늦잠에 빠진 집주인이 깰까 걱정된 C는 조심스레 구멍으로 문 안쪽을 살폈다. 몸집은 작은 녀석이 힘은 무척 셌다. C는 메리가 다칠까 봐 그 작은 머리를 구멍 안쪽으로 조금 밀어 넣어주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힘이 한쪽으로 쏠려 굽히고 있던 무릎이 뻐근했다. C는 강아지를 매만지던 손으로 제 무릎을 두어 번 주물렀다. C는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자신만을 보고 있을 메리를 여러 번 돌아보았다. 자신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고,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그가 메리를 좋아하는 이유였으니까.
집으로 돌아온 C는 대문 앞에 옴짝달싹하며 주변을 돌아보고 있는 바튼을 발견했다. C가 기분 좋게 달려오며 그에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 바튼이 두리번거리며 고개를 돌리다가 이내 C를 마주했다. 그는 새하얀 이를 내보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바튼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혼낸다기보다는 친구를 대하는 투였다. C는 산책 다녀왔어요. 메리가 절 기다리고 있어서요. 라며 자랑스레 대꾸했다.
아직 노부부가 돌아오지 않은 집은 고요했다. 계단 위로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노후화된 건물은 끼익 끼익 비명을 질러댔다. C가 교재를 가지러 자신의 방으로 먼저 뛰어 들어갔다. 바튼은 C의 곱슬곱슬한 뒷머리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2층 계단 앞에서 C를 잠시 기다리다가 햇살이 쏟아지는 2층 작업실로 먼저 들어섰다. 윌프레드가 예전에는 작업실로 썼다고는 하던데, 요즘에는 C의 공부방으로 쓰이는 곳이었다. 그가 양보해 준 건 아니고, 방치되고 있던 걸 C가 되살린 셈이었다.
곧 C가 바튼의 뒤를 따라 작업실로 들어왔다. C가 여섯 명은 거뜬히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긴 책상 중간에 책을 내려놓을 동안, 바튼이 한쪽 벽면에 기대어져 있는 화이트보드를 끌고 왔다. 수업은 평상시랑 똑같이 진행되었다. 바튼이 책에 적힌 이론들을 설명하며 C에게 예시를 들어줬다. 그는 깃털과 고무공을 양손에 들고 있다가 바닥으로 무심하게 떨구었다. 고무공이 먼저 바닥으로 떨어졌고, 마루에 닿자마자 다시 위로 퉁겨져 올라왔다. C는 그 공을 향해 손을 뻗다가 연필을 떨구었다.
“힘이란 참 신기하지. 중력도, 탄성력도 모두 힘이야.”
바튼이 떨어진 연필을 주워주며 찬양하듯 말했다. C는 손에 들린 고무공을 만지작거렸다. 오리 모양이 그려진 고무공이었다. 메리에게 주면, 아마 꼬리를 흔들면서 좋아하겠지. C가 프린팅된 오리의 주둥이를 만지작거리는 사이, 바튼의 얘기는 어느새 저 하늘 높이 로켓을 쏴 올렸고 달까지 도착해 있었다. 거기서 진공을 다뤘다가 이내 뱃머리를 목성으로 돌렸다. C는 바튼의 이야기를 듣다가 턱을 괴고서는 아침으로 챙겨둔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얘기가 길어질 테니 이참에 굶주린 배를 채우는 거였다.
바튼은 종종 C에게 우주 얘기를 해댔다. 지금처럼 중력을 설명하다가도, 설탕의 조성을 얘기하다가도 금세 행성과 태양계. 그가 가보지 못한 우주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결국 자연은 다 이어져 있다는 게 그의 대단원이었다. C는 그의 말이 진심으로 와닿지는 않았으나 그가 말하는 우주 얘기나, 무엇보다 그가 한 번씩 빌려주는 천체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보는 건 마음에 들었다. 뇌물을 톡톡히 받았으니 그를 내버려두는 거였다. 물론 얘기가 산으로, 바튼이 좋아하는 안드로메다로 떠나버릴 때면, C가 지금처럼 그의 얘기를 끊었다.
“얘기가 너무 멀리 가는데요?”
C가 제 말을 잘라먹어도 바튼은 화내지 않고 오히려 미안하다며 웃어넘겼다. C는 바튼의 내밀한 기대처럼 우주비행사나 천문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지 않았다. 바튼은 그 사실에 내심 실망하고 있었다. 눈치 빠른 C는 그의 서운해하는 속마음을 일찍이 눈치채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어떤 때는 그의 기대 어린 눈빛에 속이 메슥거리기도 했다. 대리만족. 자기가 원하는 바를 나에게 주입하려는 거 아니냐는 반항심이 그의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던 까닭이다.
하지만 C는 바튼에게 대놓고 저를 당신의 대용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교사 중에 제일 친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그와 사이가 틀어지길 바라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렇다고 다정한 말로 그를 위로하고 그가 과거에 이루지 못한 꿈을 물어볼 만큼 C의 배려심이 넘쳐나는 것도 아니었다. C는 바튼에게서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이점만을 가졌다. 물론 이렇게 말해도, C는 깨끗한 공기를 틈타 은색 총총 반짝이는 하늘에서 바튼이 말하는 별자리를 찾아낼 때마다 소름이 쭈뼛 돋는 황홀함을 느꼈다. 그래, 이것도 자기 효능감이나, 상대로부터의 피해받지 않는 선에서 취하는 장점뿐이었지만.
“이제 네 차례야.”
바튼은 책을 덮으며 C에게 제 왼손바닥을 내보였다. 그의 어색한 미소가 멋쩍게 보였다. 바튼은 수업의 끝자락마다 C가 요새 취미로 만들고 있는 로봇을 살펴보아 주었다. C가 바튼을 좋아하는 이유 중 제일 큰 이유에 속했다. C는 의자에서 내려와 침대 밑에 있는 상자를 꺼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을 윌프레드에게 받을 때마다 C는 부품을 조금씩 사 모았다. 부품 중 몇 개는 C를 기특하게 여긴 바튼이 선물로 준 것도 있었다. C가 벌처럼 생긴 로봇의 등 부분을 열어 건전지를 집어넣자, 로봇의 눈에 백색의 빛이 들어왔다. 안광처럼 반짝이는 그것은 우주 얘기를 들을 때와는 다르게, C의 눈에도 총기를 빚어 넣었다.
“대단해, C. 너에게 전구를 선물해 준 보람이 있어. 모든 학생이 너처럼 똑똑하면 좋겠는데.”
C는 날갯짓을 시작한 로봇을 내려다보며 희게 미소 지었다. 뭐……, 글쎄요. 둘 사이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바튼은 눈치가 없는 편이었다. C가 한 번씩 내보이는 싸한 기류를 바튼은 한 번도 알아챈 적이 없었다. C는 이대로 분위기가 침전되길 바라지 않았다. C는 제 종아리 부근에서 돌고 있는 로봇을 일견하다 바튼의 푸른 눈동자를 곧게 응시했다. 바튼의 선한 눈매가 호선을 그리며 물음을 담았다. 그는 여전히 C가 기분이 나쁘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C는 바튼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그걸 달리 티 내지도 않았다. 모두가 나 같다면 세상은 특별할 게 없어질 거야. 나는 나로서의 의미를 잃게 되고 내 로봇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게 되겠지. C는 바튼의 말이 비교가 아닌 단순한 칭찬에서 끝났으면 좋았을 거라고 여겼다. 제 것을 타인에게 빼앗기기 싫어하는 바람은 생명체에게 만연한 욕구였다. 바튼은 자신이 C의 그런 욕구를 건드렸다는 걸 몰랐다. 고의가 아니라는 걸 아는 C는 무심하고도 담백하게 말했다. 이번에도 C가 그를 봐줘야 했다.
“아무래도 모두가 저 같을 수는 없는 법이죠.”
2
최악이다. 이른 오후, 이미 상해버린 C의 심기는 저녁 식사를 이어 나갈 때까지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오히려 식사 시간이 되자 그의 기분은 최저를 찍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귀가한 윌프레드와 에버렛이 그에게만 일부러 후추를 잔뜩 뿌린 수프를 내주었던 탓이었다. 잔뼈밖에 없는 스튜는 그렇다고 쳐도, 이건 선 넘은 거지. 오늘 진짜 가지가지 하네. 후추 색이 티가 안 났으면 해서 일부러 토핑을 많이 넣은 수프는 어떻게 보면 정성이 듬뿍 담겨 있는 거긴 했다.
한입 먹자마자 후추의 톡 쏘는 강렬한 감각이 C의 목젖을 정통으로 강타했다. 제대로 사레가 들린 C는 들고 있던 스푼을 책상 위에 떨어트리듯 내려놓고 황급히 물컵을 집어 들었다.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기침 때문에 도저히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C는 입을 틀어막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물컵이 흔들릴 때마다 물이 조금 쏟아져 식탁보를 적셨다. 사레가 들린 것도 짜증났고, 기침이 멎지 않는 것도 성이 났다. 이런 추한 꼴을 저 둘에게 보인다는 게 무엇보다 자존심 상했다.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첫입 먹을 때부터, 아니. 받자마자 알아차려야 했는데! 저 마귀할멈의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아무리 C가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실수가 아무리 성공의 어머니라고 해도 쓰고 매운 법이다. 그가 식사 도중 에버렛과 윌프레드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본 횟수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적었기 때문에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지금과 똑같은 결과를 맞이했을 것이다. C는 코가 찡하고 시큰거려서 계속 훌쩍이며 콧물을 삼켰다. 그의 눈이 빨갛게 물들었다. C는 이내 눈을 꾹 감고서 손등으로 제 코를 문질렀다.
“이제는 먹는 것도 제대로 못 하냐?”
채도 낮은 붉은색의 식탁보가 점차 진해지고 있었다. C는 가늘게 뜬 눈으로 식탁보를 칩떠보았다. 어젯밤 내린 비로 젖은 땅처럼 식탁보가 얼룩덜룩 물들어갔다. 애초에 참은 적이 있기는 한 건지, 참다못한 윌프레드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C를 심하게 꾸짖었다. 에버렛도 눈매를 잔뜩 구긴 채 C를 노려보고 있었다. 비언어적인 표현으로도 C를 못 살게 만드는데 소질이 있는 마녀였다. 오늘도 나가서 내 욕을 신나게 하고 왔겠지. 그렇다고 기가 죽을 C가 아니었지만, 그를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애가 아주 배가 불러 가지고. 이래서 말 안 듣는 애들은 굶겨야 한다니까.”
에버렛의 저런 말을 듣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는단 말인가. 노망이 들었으면 곱게 죽을 것이지. C는 들고 있던 물컵을 입가로 기울여 억지로 물을 삼켜내고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확 끌렸다. C가 발끈할 줄 몰랐던 건지 윌프레드가 움찔 상체를 뒤로 물렸다. 쪼글쪼글하게 주름진 목 위로 선 근육이 선명했다. C는 자리에서 선 채 제 앞의 두 사람을 맹렬히 쏘아보았다. 미묘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에서는 감출 수 없는 증오와 경멸이 섞여 있었다.
“이제는 간도 못 보시는 거예요?”
그 말을 계기로 윌프레드의 손이 올라갔다. C는 그의 손이 제 시야에 들어오지 않도록 눈을 꾹 내리감고서 고개를 숙였다. 반사적으로 웅크려진 상체와는 반대로 다리 한쪽이 뒤로 빠져나와 의자를 밀었다.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 소리에 놀란 윌프레드의 손바닥이 C를 향하다가 허공에 멈춰 섰다. C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신에게 쌍욕을 해대는 두 노파를 집에 남겨둔 채 밖으로 뛰쳐나왔다. 의족과 연결된 결합부가 심하게 욱신거렸다. 꼭 타들어 가는 것처럼. 목이 메고, 눈가가 시큰거렸다.
3
C는 오전까지만 해도 여유롭게 거닐었던 그 흙길을, 이제는 누군가에게 쫓기듯 성급한 발걸음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의 배후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두 발이 지상에서 떨어지지 못하도록 온 중력을 다해 질척였다. 다리의 상처는 아문 지 오래였지만, 한 번씩 비가 올 때면 소실된 신체가 다시 재생되어 그때의 사고를 유사하게 재현했다. 병원에서는 그의 통증을 간단명료하게 진단했다. 누구나 겪는 후유증이라고.
일정한 거리마다 켜져 있는 가로등은 연노란색으로 드문드문 잔디밭을 물들였다. 지저분한 명도로 얼룩진 거리를 헤매던 C는 점차 느리게 발을 디뎠다. 높이는 같으나 질감 다른 두 밑창이 흙 위에 발자국을 새겼다. ……헨젤과 그레텔 같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운 좋게 오늘 하루 이웃집에 묵는다고 해도 내일은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C는 집을 뛰쳐나온 제 행동을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마음 한편에서는 후회하고 있다는 거였지만.
적어도 헨젤과 그레텔은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다. 늦게 돌아가든, 돌아가지 않든. C는 자신이 부모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방치가 설명되지도 않았다. 부모는 헨젤과 그레텔을 버렸고, 그들은 보호자 하나 없었다. 윌프레드와 에버렛은 C를 싫어하지만,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C가 오랫동안 바깥을 배회하면 배회할수록, 늦으면 늦을수록 늦게 들어왔다고 혼만 더 내겠지. 그들이 걱정하는 건, C의 부모님에게 설명해야 하는 귀찮음과 수고로움이었으니까.
C는 늦여름의 더위를 떨치려 티셔츠 밑단을 붙잡고 펄럭였다. 미적지근한 바람이 미약하게 살갗을 간질여 감질만 났다. 입안에 뭉친 후추 덩어리가 격렬히 제 존재를 알렸다. 때늦은 열대야로, 티셔츠에 밴 땀이 눅눅하게 목에 달라붙었다. 여름의 해가 길어서 세상은 어수룩하게 어두웠다. 메리와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혀 위에 알싸하고 씁쓸한 맛이 굴러다녔다. C가 마른침을 삼키며 혀로 윗니를 쓸었다. 날카로운 송곳니에 여린 살덩이가 긁혔다. 그렇게 하면 이 후추의 맛이 좀 사라질까 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C는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넸다. 어쩌면 위로가 아닌 자학에 가까운 변명이었다. 사실 메리는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메리는 나보다 주인아저씨를 더 좋아하니까. 메리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길 바란 적도 없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오락가락하니 울적한 기분만 배가 되었다. C는 이 애매모호한 어둠 속, 야트막한 공허에 숨이 막혔다. 세상에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잘못된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인데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웃집이 시끌벅적했다. C의 집에서는, 아니. 윌프레드와 에버렛의 집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뭐가 저렇게 좋을까. 한심해. C는 어스름이 성기게 얽힌 그늘 속에 숨어 냉소적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비틀린 입매에서 바람 빠져나가는 소리가 났다.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웃음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기침처럼, 발작처럼. 고도 다른 소리가 지리분산하게 난무하여 불협화음을 만들었다.
풀벌레가 나지막이 울었다. C는 잡고 있던 티셔츠를 손안에서 구기다 놔버렸다. 의미 없는 부채질에 물린 탓이었다. 이 이상 어디로 가면 좋을지 헤매던 시선은 순간 사위를 압도하는 굉음에 좌우로 진동했다. C는 공기 중에 울리는 짧은 이명을 느꼈다. 찰나에 눈앞이 번쩍였고, 몸의 균형이 무너져 머리가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었다. 귓바퀴의 굴곡을 따라 들어온 파동이 멋대로 일그러진 주기를 반복했다. 기압 차이가 있어봤자, 같은 평지인데. C는 아, 씨. 짤막한 욕설을 날카롭게 내뱉고서 제 귀를 감싸 눌렀다. 귓바퀴가 반으로 접혔다.
하늘에 가득 수 놓인 노란색, 빨간색. 색색의 불꽃들. C의 시선을 사로잡은 불빛들. 그의 머리통과 멀지 않은 어둠을 뚫고 꽃 모양의 불꽃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주홍색 꽃. 푸른색 나비. 초록색 물고기. 그것들이 겹쳐서 만들어내는 무대. 화약의 향수를 뿌린 천연물들이 무대 위에서 화려한 치마를 펄럭이며 날뛰었다. 주홍색은 나트륨, 푸른색은 칼륨. 초록색은 구리.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C는 가만히 멈추어 서서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귀를 가로막고 있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불꽃은 꺼질까 하면 다시 피어올라 하늘을 물들였다.
“예쁘다.”
예쁘다는 말을 되뇌기 싫어서 일부러 참고 있었는데. 멋대로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C는 그 아름다운 광경에 자신이 방금까지 생각하던 것들을 모조리 잊어버렸다. 하나의 원자가 빛을 번쩍이며 찬란하게 터질 때마다 C는 자연의 신비에 이끌리듯 그 순간에, 이 시간에 녹아내렸다. 육체를 버려두고 중력에서 빠져나와 어둠에서 별을 찾았다. 그러다 문득 화려한 빛 속에서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그 너머의 공허를 상기하듯 C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반짝이던 눈망울이 현실을 되찾았다. 시끄러워. 여전히 C의 갈색 눈동자 위로 아름다운 색채가 번져가고 있었다. 그가 닿지 않을 하늘 위로, 그가 모르는 은하를 그렸다.
허상의 별자리. 인공위성보다 더 낮은 곳의 멀고도 가까운 꿈. 잔디밭에 앉아 이 시간을 내 것인 것처럼 즐길 수도 있었지만, C는 자신의 처지에 골몰해졌다. 우주 속의 미아보다 형편없는 타이틀이었다. 지식욕에 대한 쾌락은 기초적인 욕구가 충족되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단순히 말해, C는 배가 고팠다. 그동안 굶은 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집을 박차고 나온 적도 드물었다. 집으로 가봤자 음식은 먹지 못할 테다. 냉장고에 있는 걸 몰래 꺼내 갈까. 마녀가 과일 개수를 세어놨다고 해도 어쩔 거야. C는 자신을 처량하게 여기기 싫었다.
전반에 깔린 화약내 사이로 잘 익은 육향이 은밀하게 존재감을 뽐냈다. C는 하늘로 치켜올렸던 고개를 내려 정면을 주시했다. 조금 어두워졌다 할 뿐이지 세상은 여전히 밝았다. 아니면, 저 하늘 위에 흩뿌려진, 쓸모없이 목청이 큰 섬광들이 C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C는 생각의 암운에 눈을 가린 채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방금까지 예쁘다고 했던 불꽃놀이도 그에게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과시로 추락해버렸다. 한 번 거슬리니 그때부터는 자신만 따라다니는 먹구름처럼 느껴졌다.
C는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일부러 발을 굴리며 신코에 걸리는 잔디를 힘차게 걷어찼다. 아프면 아픈 대로, 오히려 더 쑤시고 아파보자고 땅을 박찼다. 타인의 행복이 자신을 비루하게 만들 거라고, 그런 건 패배자에게만 해당하는 거라고. 하순을 물고서 후추의 아릿한 맛을 비릿한 피 냄새로 덮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자에겐 미아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았다. C는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제 감정을 억세게 짓눌렀다. 미성숙한 정신은 마땅한 이정표 없이 길을 헤매고 있었다.
그런 C의 작은 어깨를 붙잡은 건 그가 잔디밭에 있는 줄도 모르고 이제껏 신나게 불꽃놀이를 즐기던 휘트니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축축한 손으로 C의 어깨를 잡고서 거대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는 C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제 앞의 작은 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푸른 눈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제법 어둑해진 시야에서도 알아차릴 만큼 C의 안색이 탁했다. 어쩌면 사냥을 자주 나가는 그가 어둠 속에서 상대를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일 수도 있었다.
“네가 여기 서 있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네가 거기에 있는 줄은 정말, 추호도 몰랐어. 많이 시끄러웠지? 미리 발견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윌프레드 씨한테 불꽃놀이를 할 거라고 미리 말씀드렸는데, 네게도 말해줄 걸 그랬어.”
아저씨는 다정한 목소리로 C를 다독였다. 어쩌면 간접적으로 그를 나무라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C는 그가 자신을 혼내고 있는 거라는 의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C의 세상은 비꼼과 괴롭힘이 즐비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드리운 작은 그림자를 발견한 것인지 아저씨는 곧 누런 이를 드러내며 호탕하게 웃었다. C의 배에서 난 작은 천둥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C는 자신의 배를 감싸고서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렸다. 가슴께에서부터 올라오던 열기가 그의 얼굴까지 잠식했다. 후끈후끈한 망신에, C는 찢어진 하순을 다시금 물게 되었다.
“C, 우리 집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는 중이거든. 마침, 윌프레드 씨에게도 참여하실지 여쭤보려고 했는데, 너도 올래? 분명 맛있을 거야. 우리 아내의 특제 소스로 구웠거든.”
C의 어깨를 놓아준 휘트니는 엄지를 치켜세워 자신의 집을 가리켰다. C는 그가 어디 사는지 알면서도 그가 가리키는 집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늙은 호박과 마귀할멈은 저녁을 먹었으니 나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C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뭐, 어때. 헨젤과 그레텔. 걔네는 마녀의 집에서 잡아먹힐 위기에 처했지만, 나는 아저씨의 집에 따라가 맛난 저녁, 혹은 야식을 먹게 될 건데. C의 자기 동정은 금방 막을 내렸다.
“네, 아저씨! 저녁 식사를 놓쳐서 할머니께 혼날까 봐 걱정했는데, 감사해요.”
C는 자신의 처지를 제법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금까지 밖에서 놀았다. 뭐, 그런 간단한 변명이었다. 마을에서 노부부의 평판은 그저 그랬다. 혼난다 어쩐다, 농조로 말해도 이웃들은 진심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C는 휘트니와 그의 집으로 들어서며 간단한 안부를 물었다. 그다지 관심은 없지만, 예의상 하는, 단순하고도 괜찮은 어른의 배려. 휘트니, 그만의 노하우가 담긴 스몰토크였다. 그가 C를 책임질 수는 없지만, 한 끼 식사는 챙겨줄 수 있으니 말이다.
4
C는 그날 저녁, 아니, 밤. 해가 뉘엿뉘엿 산 뒤로 넘어가고 난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휘트니가 주도하는 파티가 즐거웠을뿐더러, 윌프레드와 에버렛이 자고 있을 때를 노리려는 C의 당찬 심산이었다. 물론, 늦게까지 다른 이의 집에 있는 것을 민폐라고 여기는 이들도 많지만, 휘트니는 타인이 집에 오랫동안 머무는 걸 집주인의 미덕이라고 여기는 사람이었으므로 C는 걸리는 것 없이 편히 있을 수 있었다.
윌프레드와 에버렛은 일찍 일어나는 만큼 일찍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이었다. 항상 모든 일에 예외가 있듯 그들은 때때로 부지런하게 움직이기도 했는데, 대개 귀찮은 일이 일어나질 않도록 방지하고자 하는 성격이라서 그랬다. 특히 C와 관련된 일에는 학을 뗐다. 저녁을 굶고 나간 C가 아침을 제대로 챙겼는지는 관심도 없으면서, 침실 문을 환히 열어둔 채. 평소에는 잘 켜두지도 않는 독서용 스탠드까지 밝혀두고 잠자리에 들 정도로 열성적인 사람이 되기도 했다는 뜻이다.
C가 까치발을 들고 문을 당기자, 문 상단부에 걸어둔 은색 풍경(風磬)이 저들끼리 부닥치며 유리알 굴러가는 소리를 냈다. C가 아차, 싶어서 손을 뻗어 종을 잡으려고 했지만, 풍경에 달린 새의 날갯짓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C가 주춤거리다 오히려 문을 세게 밀어버렸다. 풍경은 이때다 싶어서 철을 맞은 새처럼 고운 울음소리로 더 크게 지저귀었다. C는 입을 꾹 다물고서 1층 복도 끝, 코너 안쪽에 있는 노부부의 침실을 곁눈질했다.
C의 기대에 부응하듯 침실에서 무거운 침구가 침대 밖으로 나가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날씨가 무더운데도 선풍기 하나 틀지 않고 솜이불을 덮는 이상한 취미가 있는 부부였다. 덕분에 노인네가 일어났다는 걸 현관에서도 알 수 있었다. C는 숨을 죽인 채 제자리에 잠시간 서 있다가 자신이 왜 이렇게 기죽은 채로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C는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혹시라도 아직 잠에 깨지 않은 이가 있다면, 그를 위해서 발꿈치는 여전히 조금 든 채였다.
“이제야 오는 거냐? 너라는 애는 대체가 이 시간까지 뭘 하고 다니는 거니? 네가 아프면 괜히 일만 커지니까 빨리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 다음에 또 이러면 하루 종일 굶길 줄 알아!”
낮이고, 밤이고 소리만 빽빽 질러대는 윌프레드의 목소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 소리에 깬 에버렛이 에구머니나, 감탄사를 내뱉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다 늙은 영감이 목소리만 컸다. 나이는 저 쉬어버린 성대로 먹었나 보다. 단전에서부터 소리치는 걸 보면 복부의 지방으로 쌓였을 수도 있었다. C의 눈빛이 깜빡거리는 현관 등을 뒤로 한 채 흉흉하게 빛을 먹었다. 지금은 그가 굽힐 차례였다. 여기서 더 덤벼봐야 자신에게 좋을 게 없었다. C는 퉁명스러운 입꼬리를 하면서도 윌프레드가 원하는 답변을 내놓았다.
“네, 알았어요. 죄송해요.”
C가 사과하면, 자신이 이긴 줄 아는 유치한 노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흔쾌히 터져 나오는 사과를 들어도 화가 풀리지는 않았는지, 윌프레드는 C가 자기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의 머리통을 뚫어져라 꼬나보았다. 뒤늦게 나온 에버렛이 잔소리를 얹기 전에 C는 방문부터 닫았다. 닫힌 문 뒤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C에 대한 욕인 듯 중간중간 그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예상대로, 그들은 정작 C가 뭘 챙겨 먹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시발. 문 뒤에 선 C는 어둠 속에서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C는 그들의 무관심에 익숙해져 있었다. 잔디밭을 물들이던 가로등 불빛은 저 멀리서 전파가 닿지 않은 인공위성처럼 미약하게 빛나고 있었다. C는 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제 할 일로 주의를 돌렸다. 자신의 감정과 시간을 저 노인네들에게 낭비하기 싫었다. C는 흙이 묻은 신발을 벗어두고, 의족의 밑창을 닦아냈다. 샤워하고 나면, 비너스나 만져야지.
BeeNurse. 오늘 C가 바튼에게 보여주었던 로봇의 이름이었다. Bee와 Nurse. 생긴 게 벌처럼 생겼으니 Bee였고, 그 뒤에 붙은 Nurse에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언어유희 같아서 좋았다. Venus, Bee Nurse, Be Nurse. 벌은 세상을 유지하는 중요한 존재이기도 하니까. 따지고 보면 Nurse 같은 존재 아니야? 이유야 가져다 대면 다 그럴듯했다.
화장실은 C의 방 안에도 작게 하나 있었으나, 샤워를 하기 위해서는 꼭 1층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집에 아이가 없었던 탓에 욕실을 두 개나 만들 필요가 없었던 거였다. C는 갈아입을 잠옷을 들고서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윌프레드와 에버렛이 침실의 문을 닫는 소리가 나고 5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노부부의 방문은 경첩이 녹이 슬고, 비틀어져 문을 매번 여닫을 때마다 손톱으로 칠판 긁는 듯한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수리공에게 전화 좀 하라며 에버렛이 윌프레드를 독촉한 것도 어느새 한 달째였다. 게으른 윌프레드가 전화했을 리 만무했다. 덕분에 C는 두 사람이 언제 방에 있고, 언제 방에서 나왔는지를 알아차리기 쉬웠다. C가 방문을 조심스레 열고 복도로 나왔다. 완연한 밤이 내려앉은 복도에는 일정 거리마다 동그란 유도등이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밤눈이 어두운 에버렛이 넘어지지 않도록 윌프레드가 붙여둔 거라고 했다. C의 발이 1층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을 밟았다. C는 계단 옆에 있는 노부부의 침실을 힐끔 쳐다보았다. 닫힌 방 문틈 사이로 여전히 스탠드의 불빛이 약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P가 내일 온다고?”
“그래요, 내가 저번 주에도 말했잖아요. 그놈의 건망증. 내가 문 좀 고치라고 말한 지가 언젠데.”
“알았어. 내일은 전화한다니까. 그래도 그 녀석은 지금 이곳에 있는 놈보다 백배는 더 낫지. 처신은 잘할 거 아니야.”
한동안 듣지 못했던 P의 이름이 그들의 입에서 나오자, C의 몸이 침실을 향했다. 문에 귀를 바짝 붙이지 않아도 워낙 목소리가 큰 이들이었기에 단어 하나하나가 명확하게 C의 귀로 들어왔다. P가 온다고? P……. 속으로 그의 이름을 몇 번 읊조리던 C는 몸을 돌리고서 욕실의 문을 조용히 열었다. 쏟아져나오는 물을 맞으며 C는 작게 P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파열음이 비강을 통해 강하게 터져 나왔다.
C가 P를 보지 못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미화되고 변색한 그의 이미지가 C의 흐려진 초점 위로 빠르게 지나갔다. 겨울의 포근한 파우더 냄새가 C의 콧등을 스쳤다.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물을 멍하니 응시하던 C는 곧 손잡이를 내려 물을 잠갔다. C의 입꼬리가 점차 위로 올랐다. P는 성격이 유한 편이니까, 이 감옥 같은 곳에서 자신의 편이 되어줄 것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C는 커다란 샤워 타월로 머리를 털어내고 물기를 닦아내었다.
젖은 머리로 잠자리에 누운 C가, 그가 기억하는 P의 얼굴과 체형을 하나둘 되찾고 있었다. 바람결에 흩어지던 채도 낮은 얇은 머리카락. 허공에 수화로 그려내던 말. 안녕, C. 좋은 아침이야. 밖에 비가 오니까 우산 챙겨. 오늘 저녁에는 내가 데리러 갈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더 다정했던 말들. 소리로 떨리지 않아 더 정확했던 단어들. C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자신을 귀찮게 따라붙던 그가 이 노인네들처럼 변하지 않았기를, 유성이 되어 떨어지는 빛을 건너다보며 C는 작게 소망했다.
5
창틀에 앉은 흰점 찌르레기가 별똥별이 도사린 날개를 털어내며 곱게 울음을 내었다. 발간 햇기가 살랑이는 나뭇잎 사이로 들어와 C의 눈꺼풀을 간질였다. C는 인상을 찌푸리며 제 눈두덩이를 더듬었다. 커튼을 치지 않아 대각선의 기다란 햇살과 그림자들이 침대 위로 벽돌 무늬를 그렸다. 입을 크게 벌리고서 폐부 깊숙이 공기를 불어 넣은 C는 눈꼬리에 맺힌 물기를 닦아내며 기지개를 켰다. 위로 뻗은 손에 어젯밤 침대에 걸쳐둔 의족이 부딪혔다. 아야. 반쯤 잠긴 목소리로 C가 웅얼거렸다. C의 새 아침이 시작되었다.
P는 점심시간이 지나고 왔다. C의 과외가 끝나갈 즈음이 되자 벌써 현관이 부산스러웠다. 평소에 비하여 조금 시끄럽다고 할 뿐이지, 별다른 환영이 있는 건 아니었다. 대충 한 달 동안 묵게 될 방을 안내해 주며 몇 시 이후로는 조용히 하라는 거였다. 에버렛은 C에게 대하듯 못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살갑지도 않은 말투로 굴었다. 귀찮은 짐을 하나 더 얹게 되어 내키지 않는다는 기색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P는 그들의 태도를 이해하는지 수첩에 [ 감사합니다. 혹시 모르는 게 생기면 여쭤볼게요. ] 공손한 문장을 정갈하게 적어 보여주었다.
C의 국어 선생님, 캔은 나이 70이 가깝도록 장가 한 번 못 간 노총각이었다. 원래부터 혼자만의 즐거운 인생을 추구했던 건 아니라고 했다. 자기도 왕년엔 인기가 많았는데, 공부에 매진하다 보니 때를 놓쳤다나. C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뼛속 깊이 꼰대 기질이 흐르는 성격 나쁜 영감을 누가 좋아한다고. C는 화이트보드 위에 적힌 문장들을 보며 아래층에 있을 P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히스테릭 영감-C가 붙여준 캔의 별명-이 새된 목소리로 물었다. 매번 명령조였다.
“C, 이 문장에서 틀린 문법이 몇 개 있는지 말해 봐라.”
“음, 2개요?”
C는 턱을 괸 채 답했다. 그래, 이제는 안 틀리는구나. 네가 언제까지 틀릴지 윌프레드와 내기를 했는데, 드디어 그 친구가 나한테 한잔 사겠구먼. 캔이 지팡이로 바닥을 찍으며 반색했다. 윌프레드와 캔은 학교 동창이랬다. 가끔 윌프레드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캔과 마을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온 거였다. 캔이 이겼든, 졌든. 자기를 두고 내기했다는 사실이 열받긴 했지만, C는 가뿐히 무시하기로 했다. P가 옛날에 자신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모습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궁금해서 수업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정신은 이미 1층에 있었다.
캔은 C에게 초판본과 똑같은 표지를 가진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건네며 다음 주까지 이 책에 수록된 햄릿과 오셀로에 대해 독후감을 써오라고 숙제를 내줬다. 그러고는 절대 책을 훼손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다. 자신의 소장본을 빌려주는 거니 말이다. C는 책등의 두께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책을 펴보니 편집자의 주석과 설명까지 세세히 적혀 있어서 언뜻 보면 논문이나 평론집처럼 느껴졌다. 다른 과목 선생님들이 내준 숙제들로도 이미 넘치는데, 하나가 아닌 두 개나 하라고. 내가 당신 수업만 듣는 줄 아나. C는 괜스레 캔이 말을 정정할까 싶어서 물어보았다.
“햄릿과 오셀로, 둘 다 다음 주까지요? 책을 잘못 주신 거 아니에요?”
“하……. 그 책 맞아. 표지에 적혀 있는 걸 보고도 되묻는 거냐, C. 햄릿과 오셀로. 목차에 보면 잘 적혀 있잖아.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도 벅찬데, 눈까지 멀어버린 게니.”
끼리끼리라더니. 윌프레드와 캔은 상대를 깎아내리고, 비하하는 특유의 경박스러운 말투를 구사했다. C는 흐릿한 거짓 미소를 입가에 그리고서는 네, 안경을 써야 할까 봐요. 라고 답했다. 여기서 다른 숙제들도 많다고 말해봤자 욕만 더 얻어먹을 거였다. C는 예의상 조심해서 가시라는 말과 함께 시선을 거두고선 책상을 정리했다. 약간의 비꼼은 덤이었다. 캔은 버르장머리 하고는, 이라고 말했지만, C를 붙잡지는 않았다.
“손님이 와서 먼저 내려갈게요, 선생님. 다음 주에 뵈어요.”
이것도 예의상 하는 말이었다. 캔을 기다리는 거야 얼마 걸리지도 않을 테지만, C는 캔을 기다려주고 싶지 않았다. 이미 책과 필기구를 품에 안은 C는 착하고 총명한 학생의 눈으로 캔을 바라보았다. 캔은 C가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칭하면, 끔뻑 넘어갔다. 캔은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C도 캔을 싫어하고, 캔도 C를 까 내렸지만, 캔은 C를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은 학생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C는 방을 나서며 전교에서 제일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인 척하던 일명 가증스러운 표정을 지워냈다. 장난기 어린 눈망울이 샛노란 햇볕을 받아 반짝였다. 그는 들고 있던 짐들을 대충 자신의 방 책상에 올려놓고는 계단을 쿵쾅거리며 내려갔다. 낡은 나무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다른 칸은 괜찮은데, 유독 몇몇 계단이 시끄러웠다. 걸을 때는 조용하지만, 뛰면 뛰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제 주인을 닮아 성격이 더러웠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C는 신이 나거나 집에 윌프레드와 에버렛이 없을 때면 뛰어서 내려오곤 했다. 일부러 소리 나는 칸에 서서 뜀박질하기도 하고, 발을 굴리기도 했다. 은근한 화풀이이자, 아무도 없을 때 즐길 수 있는 C의 오락거리 중 하나였다. 피아노 연주하기, 로봇 조립하기, 골칫덩어리 계단 위에서 뛰기. 창틀에 손 올리고 상체를 내밀기 같은 것 말이다. 더 이상 나무 위에 올라가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때 구해준 고양이가 한 번씩 찾아와서 우유를 나눠주는 일과도 포함되어 있었다.
계단이 삐걱거리며 연주를 해대자, 윌프레드가 거실에서 불만스러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집에 P가 있다는 걸 의식한 모양이었다. P는 짐을 풀다 말고 방문을 열고서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핸드레일에 한 손을 올리고 있던 C의 눈에 예전보다 더 키가 커진 P의 형상이 맺혔다. P는 잡고 있던 문손잡이를 놓으며 C에게 인사를 건넸다. 손짓으로 하는 다정한 말. 여전히 C가 기억하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P는 전보다 더 상냥한 낯을 하고서 미소를 지었다.
[ 안녕, C. 그동안 잘 지냈어? ]
C는 그 말이 보기 싫었다. 들을 수는 없으니 본다는 말이 옳았다. P를 눈에 담던 C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벌어진 동공이 자신에게 주입된 P의 이미지를 거부하고 있었다. C는 이내 비뚤어진 입매로 습소했다. 모순되면서도 휘어진 호선이 호의적이었다. P는 C의 이중적인 희소를 보며, 혹시라도 C가 수화를 잊었나 싶었다. 그는 그제야,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 안녕, C. 그동안 잘 지냈어? ]
잘 지냈냐는 말을 두 번이나 할 만큼 P는 곰살맞은 사람이었고, C는 그 살가움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동안 얼마나 잘 지냈길래, 자신에게 잘 지냈냐고 묻는지 책망하고 싶었다. 내가 여기서 갈굼을 받는 동안, 너는 잘 지냈구나 싶어서 못되게 굴고 싶어졌다. P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더 일찍 자기를 보러 오지 않았냐고 티를 내고, 나무라고 싶었다. P에게는 그럴 만한 책임도 없다는 걸, C도 알고 있었다. 아는 것과 마음은 다르지 않나. C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천천히 다물린 입술을 열었다. 혈색 도는 피부, 붉은 기가 은은히 감도는 하순이 답했다.
“잘, 지냈어. 너도 잘 지낸 것처럼 보이네.”
안부 인사는 그게 끝이었다. C는 P를 지나쳐 그대로 집을 나서버렸다. P가 C의 일상에 들어오는 게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P라는 사람이 이 집에서 그 어떠한 의미나 가치를 보유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집이 주는 방임이 얼마나 사람의 목을 조르고 한 존재를 작게 만드는지 느낄 수 있도록. P는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C의 옆모습과 뒷모습. 눈을 깜빡일 적마다 바뀌는 모든 순간을 페이퍼 애니메이션의 컷처럼 바라보았다. 여름의 햇살은 뾰족해서 현관문에 달린 얇은 시폰 너머로 보이는 밖이 지나치게 밝아 보였다.
P는 복도에 덩그러니 남아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는지 곱씹어보았다. 잘 지내지 못했던 걸까. 내가 세심하지 못한 걸까. 한창 예민할 시기지. 이런저런 고민이 그의 뇌리에 맴돌았다. 사람이 살지만, 혼자 있는 것 같은 집. 풍경이, 유리가 맞부딪히며 울어댔다. 아름다운 선율에 어울리지 않는 공허.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고조 없는 말과 환풍기 팬이 돌아가는 소리. 함께 있지만 각자가 격리된 집. 함께 있지만 함께 있는 것이 아닌 집.
P는 이곳에 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이 집이 주는 위화감과 위압감에 압도되었다.
6
안타깝게도 P는 이곳의 지리에 미숙했다. 오늘 처음 이 마을에 왔으니 당연한 얘기였다. 내비게이션에 그려진 자신의 위치는 단면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해서 윌프레드나 에버렛에게 어느 빵집이 제일 맛있는 식빵을 파냐는 등의 현실적인 충고를 얻기에는 그들이 워낙 우호적이지 않았다. P에게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있는 만큼 천천히 마을을 탐방해도 되었지만, 그는 자신을 붙잡아달라고 말하는 듯한 C의 뒷모습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그런 그에게 사과하려면, P는 제 말 중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P는 24인치 캐리어에 든 짐을 하나씩 꺼내어 옷장에 걸면서 제 기억도 차차 되감아 보았다. 자신이 수화를 해서 기분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수업 중에 혼이라도 났던 걸까. 어린 나이에 부모님 곁을 떠나 친척에게 맡겨진 아이에게 잘 지내고 있냐고 물은 게 화근이었을지도 모른다. P는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질문을 했는지 깨달았다. 한창 예민할 나이에……. C에게 사과를 건네고 제대로 된 가족 구실을 해주고 싶었다. 앞으로 한 달간 이곳에 있으면서 친해지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누구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필요하니, 자신이 다독여 줘야만 했다.
P가 집을 나서려고 하자 에버렛이 저녁 식사 시간은 5시라고 재차 강조했다. P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퍼진 다사로운 온기에 에버렛은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서 입매를 비틀었다. P는 주머니에 넣어둔 공책과 연필을 만지작거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주변에 퍼져 있는 푸릇푸릇한 잔디가 건강한 기운을 내뿜었다. 집 간의 경계 없이 잔디가 일제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울타리를 친 집이 적지 않았지만, 없는 집이 더 많았다. P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서 어중간할 정도로 찝찝한 손바닥을 미풍에 말렸다. 그의 지문에 묻은 흑연은 날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P가 2,000보 정도 걸었을까. 그는 환히 열린 대문, 목줄 없이 돌아다니는 강아지가 잔디밭에 누워있는 C의 얼굴을 열심히 핥고 있는 걸 발견했다. C의 티셔츠가 미량 올라가 새하얀 배와 흉터가 보였다. P는 C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자그마한 강아지와 해맑게 웃는 C. P는 멀리 떨어져서 C가 웃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기억은 과거만을 미화하지 않는다. 머릿속에 저장된 정보는 꺼내 보면 꺼내 볼수록 헤어진다. 많이 본 책의 종이가 누렇게 변하는 것과 비슷했다.
“간지러워, 메리.”
이곳에서 들은 것 중 가장 산뜻한 음성. 생명력이 넘치는 여름. 물비린내가 올라오는 호수의 물비늘을 오리가 날아오르며 일그러뜨렸다. P는 지금, 이 순간을, 자신을 둘러싼 이 상황을 사진으로 찍어 보관하고 싶었다. P는 주머니 속에 넣어둔 수첩을 꺼내었다. 뾰족하게 깎은 연필 끝이 부서져 선이 두 줄로 그어졌다. P는 연필의 심을 한쪽으로 기울여 다시 선을 하나로 만들었다. 손에 묻은 흑연이 새하얀 종이 위로 물결을 만들었다.
P는 글과 그림으로, 낙서를 빙자한 기억을 수첩에 기록했다. C가 제 얼굴을 침 범벅으로 만든 메리를 놓아주고선 얼굴을 닦아냈다. 그는 가늘게 뜬 시야 속 P를 발견하고서 뭐야, 혼잣말을 지껄였다. P는 C가 자신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는 것도 모르고 여전히 지금의 상황을 그려내는 데에 몰두하고 있었다. 미적지근한 온도. 물비린내 나는 바람. 얼룩진 명도. 제 얼굴을 적시는 햇살의 각도까지도. P가 집으로 돌아가서 C를 떠올릴 때면, 다른 장면이 아니라 딱 이 광경이었으면 해서.
메리가 꼬리를 흔들며 P의 발치로 뛰어왔다. 메리는 P의 근처에서 뱅뱅 돌다가 P의 신발에 코를 박고 그의 냄새를 맡았다. 처음 맡는 냄새. 처음 보는 사람. 메리는 낯선 사람을 향해 으르렁거리기보다는 뼈가 부러질 정도로 꼬리를 흔들어 댔다. C의 친구는 자기의 친구였다. C와 메리가 자신에게로 올 거라고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P가 뒤늦게 깜짝 놀라서 들고 있던 수첩을 위로 들어 올리며 입을 살짝 벌렸다. 그의 목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당황했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뭐 해.”
물음치고는 끝이 아래로 내려간 문장이 C의 입에서 툭 던지듯 흘러나왔다. 아까보다 더 무심한 말투에 P는 자신을 등지고 집을 나서던 C의 표정과 지금의 표정을 비교하게 되었다. 아까 내게 지었던 표정은 연기였구나. 이게 C의 진짜 마음이구나. P는 더 유하게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눈썹을 아래로 내리고, 곡선을 그린 눈매로 애정을 담아 마주쳤다. 키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려다봐야 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눈빛에는 상대를 향한 존중이 담겨 있었다. P는 수첩을 뒤로 넘겨 끄적여 답했다.
[ 네가 행복해 보여서 보고 있었어. ]
“뭔갈 쓰고 있었잖아.”
[ 일기야. 이곳에서의 일을 기억하고 싶어서. ]
“……왜 내 얘기를 멋대로 쓰는 건데.”
C는 P의 대답이 시원찮다고 받아들였다. 거짓말 같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P가 수첩에 긴 줄을 그었다. 한 줄 적을 때마다 글을 읽는 상대가 헷갈리지 않도록 상기 내용의 한중간을 선으로 덮었다. C는 그의 손이 움직이는 걸 지켜보다가 손을 뻗었다. 튀어나온 입술이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무엇을 그렸는지, 혹은 썼는지. P의 기록에 자신이 남는다는 게 왜 불편한지 C 자신도 모르겠지만, C는 내용을 확인하고 싶었다.
“볼래.”
[ 기분 나빴어? 미안해, 보여줄게. ]
연필을 든 채 C를 응시하던 시선이 잠시간 곤혹을 머금었다. 좌우로 미약하게 흔들리던 동공이 아이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교생선생님 같았다. 자신이 상대를 위해서 마땅히 배려하고 이해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위치에 자기가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구는 게 C의 심기에 거슬렸다. 자기가 연장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선생의 역할을 자처하는 게 꼴사나웠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그래. 그래서 꺾고 싶었다. P는 다정한 사람이니까. 지금처럼 자신에게 꺾여줄 사람이니까. 자신의 옆에 두고 싶으면서도 꺾고 싶은, 그런 잔혹성이 C의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C는 P의 수첩을 건네받았다. 사실 P가 종이를 앞으로 넘기기도 전에 C가 그의 수첩을 가로챈 거였다. 덕분에 P는 종이에 손이 베일 뻔했다. C는 한 장 앞으로 넘겨 P가 일기라고 했던 글과 삽화들을 살펴보았다. 흑연이 번져 부분부분 뿌연 느낌이 들었다. 하늘의 음영과 호수의 물결로 번진 자국들이 스며들어 있었다. P는 베일 뻔한 손끝을 엄지로 문질렀다. 약하게 일어난 살갗이 덮이도록 매만지면서도 C가 제 행동을 몰랐으면 해서 허벅지 옆에 손을 내리고 있었다.
C는 P의 그림을 가만히 보다가 손으로 북 수첩을 찢었다. 끝이 엉망진창으로 찢겨 나갔지만, 페이지 속의 그림과 글만은 온전했다. P는 C의 손에 들린 제 수첩과 분해된 종이를 보고서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손이 움찔거리며 C를 향하려다 허공에 멈춰 섰다. 왜 찢었냐고 묻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수첩이 없으니 C에게 말을 전할 수 없다고 판단한 P는 체념하듯 손을 다시 아래로 내리고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다 C가 자신의 말을 알아차리든 못 알아차리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 제 흉부 아래에서 단어를 만들었다.
[ 미안해. 함부로 네 그림을 그려서. 너와 함께하는 한 달의 기억을 간직하고 싶었어. ]
C는 균형 잡힌 미소를 지었다. 어느 한쪽으로 비뚤어지지 않고 정갈하게 휜 호선. 기분이 좋은 건지, 좋지 않은 건지 알 수 없는 눈빛. C는 P에게 답했다. 다음에는 내 허락받고 그려. 함부로 내 얘기 쓰지 말고. 기분 나쁘니까. C는 말이 끝나자마자 입가의 미소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상대에게 명령을 내리는 듯한 고압적인 태도가 홧홧한 늦여름의 열기를 타고 P에게로 전해졌다. P는 숨을 얕게 들이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C가 자신의 수화를 알아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운 좋게 타이밍이 맞았을 뿐이니까.
7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호수를 한 바퀴 돌아 귀가하기로 한 C와 P는 서로 보폭을 맞춰 걸었다. C의 여유를 가늠해 P가 보폭을 좁게 하거나 보폭은 그대로 유지해도 더 느리게 발을 내디뎠다. 어느 때에는 C의 걸음에 맞추어 P가 더 부단히 움직였다. 종종걸음이 되기도 했고, 한 번씩 시선을 보내 C가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판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P는 특유의 선선한 미소를 계속 짓고 있었다. 공기 중에 잔잔하게 깔린 맹하고도 유한 그의 분위기가 C의 기분을 오락가락하게 만든다는 걸 모르는 채. 둘은 흔들리는 잎새 아래로 잔디밭을 가로질렀다.
“P, 나 저기서 아이스크림 사 줘.”
호숫가의 산책 코스는 C의 기준으로 1시간이 조금 걸리지 않았다. 둘이 40분 정도 걸었으니, 앞으로 20분 안에는 집에 도착하게 될 예정이었다. C는 처음부터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심산이었던 건지 자연스레 P를 바라보며 아이스크림 트럭을 가리켰다. P는 이런 C의 행동이 그 나이 또래에 어울리는 모습이라 귀엽게만 보였다. 물론 C가 먼저 아이스크림 트럭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P가 먼저 저기에 트럭이 있다고, 말을 붙였을 테지만 말이다. P는 고개를 끄덕이며 C에게 무슨 맛이 먹고 싶냐고 수첩에 적어 보여주었다.
“봐야 알겠는데?”
아이스크림 트럭이 자주 오지는 않는 건지, 아니면 C가 이쪽으로 자주 오지 않는 건지. 자주 와도 사 먹지 않아서 메뉴를 모르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메뉴를 다 외우지는 못해서 그런 걸지. 보통은 트럭을 주의 깊게 보았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가 있다, 없다 정도는 알 텐데. P는 그저 알겠다는 뜻으로 이미 트럭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C의 발자국을 제 것으로 덮었다. 만약 용돈이 적어서 그동안 트럭에 가까이 가지 못했던 거라면, 지금부터라도 자기가 많이 사주면 되니까.
C는 발꿈치를 들고서 트럭에 전시된 아이스크림의 종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얀색 조명을 쏘고 있는 매대 안쪽에서는 굳이 말하자면, 일반적인 바 형태의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토핑이 많이 올라간 젤라토를 팔고 있었다. 휘핑크림처럼 쌓아 올린 젤라토는 이미 많은 사람이 다녀갔는지, 차가운 철통과 거의 수평을 이루는 것들도 대개 있었다. C는 젤라토 앞에 적힌 이름들을 보며 반으로 잘린 체리들이 양껏 올라가 있는 통을 향해 검지로 가리키며 P를 돌아보았다. 새하얀 이가 그의 기분이 잔뜩 고조되어 있다는 걸 드러냈다. 뺨에 옅게 오른 홍조 위로 3시를 지나는 햇살이 사선으로 들어와 C의 속눈썹 아래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C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구나. 예전부터 그랬지. C의 눈은 항상 총기를 먹어 반짝였고, 곱슬거리는 머리는 자연의 유연함을 담아 부드러웠다. 좀 더 자주 찾아올 걸 그랬어. C가 자라는 걸 더 자주 추억할 수 있도록 더 자주 만났어야 했다. P는 C 없이 지나간 시간이 문득 아쉽게 느껴졌다. P는 C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던 수첩에 주문을 적었다. 트럭 안에서는 아저씨가 무언가를 계속 찾다가 이내 포기한 듯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P는 괜찮다며 입가에 미소를 덧그렸고, 들고 있던 수첩을 보여주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5.8 달러입니다.”
P가 계산하는 동안 C는 발꿈치를 내리고서 아이스크림 진열장에 입김이 서릴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대었다. 그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다음에는 무엇을 먹으면 좋을지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윌프레드와 에버렛이 용돈을 주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단순히 매번 C가 이곳을 지나갈 때마다 트럭이 없었던 거였다. 운이 좋네. C는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진열대 앞에서 머리를 물렸다. 몸을 돌려 호숫가로 먼저 가버리는 C를 지켜보던 P는 콘 두 개를 들고서 뒤늦게 그의 곁으로 합류했다.
P에게서 젤라토를 건네받은 C는 P가 들고 있는 레몬 맛 젤라토를 보고서 한쪽 눈썹을 구겼다. 왜 그딴 맛을 먹는 거냐는 표정이었다. 레몬 슬라이스가 잔뜩 올라간 하얀 아이스크림에서 톡 쏘는 향이 풍겨 나왔다. C는 반쪽씩 올라간 체리를 한 개 이 떼어먹고는 이내 어깨를 으쓱거렸다. 신선한 체리의 향이 C의 혀 위에서 춤을 췄다. 풍미가 깊고 달달한 맛이 제 입술을 적시자, C는 P가 어떤 맛을 먹든 상관 없어졌다. 어차피 자기가 안 먹으니 된 거 아닌가.
물방울 맺힌 잔디를 씩씩하게 걸어가는 C의 표정이 유순하게 풀려 있었다. 아까 그림을 그린 일로 조금 어색했는데, 이제는 제법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 P는 한숨처럼 웃음을 흘렸다. P는 젤라토의 맨 윗부분을 작게 베어먹었다. 시원하고도 폭신한 질감이 잇새로 찬찬히 녹아내렸다. 정석적인 레몬 젤라토보다는 레몬 셔벗의 성향이 강한 식감이었다. 그러다 문득 P는 C에게 어때, 맛있어? 라고 물어보고 싶어졌다. 이미 만족스러운 고양이처럼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C의 옆모습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얇은 카디건 주머니를 헤집던 P가 연필을 꺼내었다. 수첩을 펼치려던 순간, 콘을 들고 있던 손가락과 수첩을 잡던 손가락이 서로 엇갈렸다. 수첩과 연필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연필의 흑연이 완전히 깨졌다. 수첩도 구겨져 P가 이곳에 오기 전, 제 소설에 넣으려고 적어둔 문장과 영감을 받은 부분을 기록한 페이지가 펼쳐졌다. 마을까지 통하는 열차를 타고 오면서, 객실에서 바깥의 풍경을 내다보며 적었던 문구들과 그때의 기분. 그 아름다운 것들이 통합된 감각에서 은밀하게 얼굴을 숨기고 있는 자연의 폭력성까지도. P는 언제나 좋은 것들만 기록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C를 기억함에 있어서는 좋은 것들만 남겨두려고 할 테지만.
C는 P가 적어놓은 글자를 유심히 볼 만큼 P에 대해 깊은 관심은 없었다. 그저 당황한 낯으로 진땀을 흘리며 몸을 숙인 P보다 자신이 더 날쌔다는 게 중요했다. C는 P보다 빠르게 허리를 굽혀 수첩을 낚아챘다. 수첩에 적힌 문구를 읽으며 C가 짧게 일소(一笑)했다. 냉소라고 하기에는 그의 웃음에는 꼭 이 늦여름이 가져다주는 만큼의 밍근하고도 축축한, 젤라토가 녹아 P의 손가락을 적시는 정도의 모소(侮笑)가 들어 있었고, 그보다 미지근한 희소(戲笑)가 깃들어 있었다.
“바보.”
“먹기나 해. 나중에 얘기하고.”
중간에 한 번 끊긴 C의 말은 퍽 다정했다. 마치 이렇게 어리숙한 모습을 선보이는 P가 자신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처럼. 이제부터는 자신에게 조금 더 다가와도 괜찮다는 허락처럼. P는 그런 C를 보며 수긍했다.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이 손샅을 비집고 들어와 끈적하게 달라붙어도. 이 진득한 여름이 지금의 이 기분을 해칠 수도, 표현할 수도, 방해할 수도 없었다.
8
젤라토 아저씨는 그날 이후로 자주 마을을 순회했다. 새로 단골이 된 P와 C가 그의 마음에 쏙 들었던 까닭도 있었다. 아저씨는 둘을 자기 친한 동생 혹은 자식 정도로 대했다. 어떤 날은 서비스로 한 스푼씩 더 얹어주기도 했고, 기분이라며 무료로 퍼주는 날도 있었다. 손 큰 아저씨의 지속적인 단골 관리 덕에 C는 거의 매일 같이 P를 이끌고 아저씨를 찾아갔다. P는 C가 자신을 쉽게 대해주니 그마저도 흡족하게 여겼다.
오늘은 C와 P가 일찍부터 집을 나서는 날이었다. 아저씨가 출장을 가야 할 일이 생겼다고 해서 일부러 잡은 약속이었다. C는 오늘따라 P가 자주 먹는 레몬 맛 젤라토의 맛이 자신이 아는 맛과 다른 건지 궁금했다. 저렇게 한결같이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걸 좋아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C가 P의 손에 있는 젤라토를 자신에게로 기울여 시험 삼아 먹어보았다. 가늘어진 눈매로 맛을 음미하던 C는 곧 미간을 좁히며 혀를 내밀었다.
“엑, 이걸 왜 좋아하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아저씨는 C에게 물을 건네며 좀 상처인데?, 콧등에 주름이 질 정도로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P의 입맛을 탓한 것뿐이었던 C는 제 취향이 아닐 뿐이에요. 라고 입술을 내밀며 자신의 말실수를 변명했고, P는 옆에서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는 이내, 자기도 알고 있다며 C에게 물을 건네주었다. 입을 헹구라는 뜻이었다. 나중에는 이 맛에 중독되는 날이 올 수도 있어, C. 세상일은 모르는 거란다. 약간은 꼰대 같은 말도 그날의 덤이었다.
아침부터 한 시간 넘게 걸은 C는 하품을 크게 내뱉었다. 배도 부르고 날도 따뜻하니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입이 달아서 텁텁했다. 에버렛과 윌프레드가 장을 보러 나간 사이, 거실 소파를 차지한 C가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를 일깨우듯 휴대전화에서 알림이 울렸다. 수학 선생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연락을 보낸 거였다. 갑자기 시간이 붕 뜬 C는 아싸, 신이 나서 자신의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부엌에서 마른 식기를 정리하던 P가 고개를 내밀어 코너로 사라지는 C의 뒷모습을 올려다보았다.
방으로 도착한 C는 침대로 향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레몬 찌꺼기가 이빨 사이에 낀 건지 찝찝했다. 그는 혀로 이 사이를 깔짝이며 터덜터덜 책상 앞으로 방향을 돌렸다. 국어 선생도, 수학 선생도. 숙제가 산더미였다. 지금 낮잠을 자면 기분은 좋겠지만, 내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C는 두꺼운 책을 벽돌 대하듯 자신의 앞에 던져두었다. 열린 창틈 사이로 은은한 꽃향기가 넘어왔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P가 커다란 스케치북과 펜을 들고서 호숫가로 향했다.
C는 2층, 자신의 방에서 P를 내다보았다. P는 아직 날씨가 더운데도 카디건을 챙겨 다녔다. 그는 예술적인 사람처럼 보였지만, 덧댄 옷감 때문에 답답해 보였다. C는 서늘했던 P의 손가락을 떠올렸다. 아이스크림이 녹아 흐르던 손가락. C는 점차 멀어지는 P의 뒤통수를 향해서 들고 있던 연필을 던지는 시늉을 했다가 작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비행기가 아닌 이상, P의 머리를 맞추기란 어려울 터였다. 그렇다고 딱히 정말 그의 머리를 맞추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P는 침대 아래를 곁눈질했다. BeeNurse를 꺼내어 만지는 편이 더 재밌을 게 뻔했다. 문제가 안 풀리는 건 아니었다. 모처럼 수업도 없는데, 이렇게 방에 앉아 시간을 축내는 게 싫었던 거였다. 세모가 그려진 문제에서 직선을 그어 삼각형의 반을 갈랐다. 90˚. 수식을 그 옆에 끄적이며 답을 적은 C는 연필을 책 사이에 끼워두고는 의자를 뒤로 밀어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끌려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하도 페이지를 뒤로 넘겼다가 앞으로 도로 넘기기를 반복해서, C는 이 뒤로 몇 문제가 더 남았는지 뻔히 알고 있었다. 이 정도는 저녁에 해도 충분했다.
C는 곧장 방을 박차고 나와서 1층에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에버렛이 과거에 피아니스트로 활동했을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다고 했지만, C는 한 번도 그녀의 연주를 들은 적이 없었다. 연주하지 않는 피아니스트. 낡은 악보. 그런 것들은 대체 무슨 의미를 띄는 걸까. 온통 과거의 영광뿐인 집이었다. 영광에 먼지가 쌓이는 게 싫었던 에버렛은 피아노를 언제나 깨끗하게 유지했다. C는 서재에서 가져온 악보를 펼쳤다. 피아노는 열심히 관리하면서, 에버렛은 그 악보가 없어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C는 건반 뚜껑을 들어 올리고 보면대에 악보를 올려놓았다. Chopin Nocturn Op. 9 No. 2. 악보를 보면서 쳐도 C는 계속 같은 부분에서 실수를 반복했다. C는 반복적으로 틀리는 부분이 다가오면 눈을 부릅뜨고서 건반을 노려보았다. 엄지가 새끼손가락 옆으로 넘어가 다음 음을 치는 게 왜 이렇게 안 되는 건지. 결국 성이 난 C는 건반을 세게 내리쳤다. 여러 음이 한꺼번에 눌려 흉측한 소리가 났다. 창가에 앉아 있던 새가 멀찍이 도망쳤다. C는 입으로 후, 숨인지 한숨인지 모를 호흡을 내뱉고서 양손을 허벅지에 문질렀다.
자기는 얼마나 잘 친다고. 도망간 새를 눈을 꾸짖으며 C가 연주를 재개했다. 천천히 평화롭게, 서정적이고 섬세한 선율이 건반을 누를 때마다 점차 음을 쌓아갔다. 드디어 계속 틀렸던 부분을 무사히 넘기고, 우쭐해진 C는 서둘러 다음 장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그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C는 괜스레 눈을 감고서 자신이 무대 위에 올라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상상했다. 지휘자의 박자에 맞추어, 바이올린 연주자와 화합을 맞추는. 그렇게 C가 실눈을 뜨고서 자신이 외우지 못한 부분을 컨닝하며 무사히 이번 장까지 마무리했다. C는 악보의 연주가 끝나지도 않았지만, 두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며 세레머니를 선보였다.
언제부터 C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었는지, 응접실로 들어온 P가 C에게 열띤 박수를 보냈다. 세레머니를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주도 완벽했는데, 거리낄 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C의 뺨에 새빨간 홍조가 퍼져 귓불까지 완전히 익어버렸다. 여름철 복숭아보다는 겨울철의 딸기 같은 느낌이었다. 홧홧해진 얼굴을 애써 티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가리는 건 더 자존심 상했다. 결국 C는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나서는 가시 돋친 말투로 상황을 빠져나왔다.
“왜 노크도 안 하고 들어와서 멋대로 내 연주를 들어?!”
P는 C의 반응에 적잖게 놀랐는지 눈을 끔뻑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까지 부드럽게 풀려 있던 그의 표정 위로 긴장감이 드리웠다. 딸꾹질이 나왔지만, 음이 소거되어 공기 중에 있는 몇 개의 분자만 겨우 진동했다. P는 제 바지 주머니 위를 황급히 더듬었다. 딸꾹질이 날 때마다 상체가 떨렸다. 아무리 매만져도 요철 하나 없는 게, 카디건 안에 수첩과 연필을 넣어둔 것 같았다. P는 양 손바닥을 C에게 내보이며 중간으로 모았다가 바깥으로 펼쳤다. 일반적으로 아니라고 부인할 때 쓰는 제스쳐였다. P는 이어서 손으로 문장을 만들어냈다.
[ 고의가 아니었어. 문이 열려 있길래, 우연히 피아노 선율에 이끌려 들어온 것뿐이야. 연주 잘하던걸, C. ]
칭찬으로 끝나는 말은 위기 모면을 일부 함의하고 있었으나, 진심이 담겨 있었다. P는 C가 자신의 말을 이해해 주길 바랐다. 공기의 흐름을 훼방 놓던 두 손은 이내 잠시 C의 눈치를 살폈다. P는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서 힘을 꾹 주고 숨을 잠시간 참았다. 얼굴이 점점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런 P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C는 제 머리를 세게 헝클이다가 이내 건반 뚜껑을 아래로 내렸다. 오늘의 연주는 이게 끝이라는 뜻이었다.
P는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피아노의 건반 뚜껑 위, 매끈한 곡선을 손으로 훑고는, 엄지로 채 닦이지 않는 먼지를 쓸어내렸다. C가 P의 얼굴을 째려보며 됐어, 라고 짧게 대꾸했다. 분은 P의 말을 듣고서 진작에 풀렸지만, P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다. 무엇보다 C는 자신의 연주를 남에게 들려줄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C의 심리를 파악한 것인지 P는 쉽사리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다. P는 건반 뚜껑 위에 지문으로 한 자씩 글자를 써 내렸다.
[ 우리 같이 연주해 볼래? ]
함께 연주하는 피아노. C는 자신이 왜 그래야 하냐고 반항하고 싶었지만, 마지못한 척 의자를 반쯤 양보해 주었다. P는 C의 옆에 앉아 건반 뚜껑을 젖혔다. 보면대 위에는 여전히 악보가 올라가 있었다. P는 그 악보가 아닌 다른 곡을 한 마디씩 연주했다. P의 길고 가는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현란히, 하지만 저만의 여유를 가지고서 세기를 달리했다. 가볍게 들리는 손목과 튕기듯이 올리가는 손끝. P는 C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고 있었지만, 그보다 악기를 연주함에 있어 필요한 인내심과 평온을 알려주고 있었다.
C는 P가 알려준 대로 천천히 한 손씩 연주를 따라갔다. P는 C가 틀리면 틀리는 대로, 기다려 주고 더 어울리는 쪽으로 변주했다. 반복적으로 음을 누르고, 저음대에서 음을 맞추다가 금방 가볍게 고음을 연주했다. 둘이 함께 있어서 좋은 낮. 저녁. 아침. 그리고 밤. C는 P가 좋았다. 자신과 눈을 맞춰주는 P가, 자신에게 맞춰주는 속도가, 자신을 믿어주는 선한 의지가. 아름다운 연주는 혼자가 아닌, 함께 만들어 가는 거라고. P는 C에게 알려주었다. 정해진 악보가 아닌, 둘이 함께 만들어 가는 이야기, 노래. 정해진 것 없는 인생처럼.
9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좀처럼 피아노를 만져볼 기회가 나지 않아 곡은 여태 ‘무제’로 남아 있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C는 윌프레드와 에버렛이 얼른 어디로든 가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의 바람을 알기라도 하는 듯 둘은 집에 온종일 붙어 있었다. C는 얼른 P와 다시 피아노 협주곡을 치고 싶었다. P에게 자신이 얼마나 그때의 음들을 잘 외우고 있고, 칠 수 있는지 자랑하고 싶었다.
C는 불퉁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발을 까딱거렸다. P는 C의 마음도 모르고 열심히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침을 먹자마자 부지런히 외출 준비를 한 P는 C에게 오늘도 다녀오면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C는 P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알겠다며 건성건성 답했다. 별로 관심 없는 척했지만, 한편으로는 P가 자신을 두고 나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다.
C는 현관을 나서는 P의 뒷모습을 보면서 늘어지게 하품했다. 아직 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그의 눈가 주변에 새하얀 먼지가 떠다녔다. 햇살이 밝아 눈이 감기는 건지, 아니면 어젯밤에 늦게 잠이 들어서 눈이 감기는 건지. 어젯밤에 본 영화 대사를 중얼거리며 C는 눈을 끔뻑였다. 낮잠을 자기 좋은 날이었다. 요즘 날씨가 선선한 게, 마음이 살찌는 계절. 몸도 마음도 살찌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P는 독서의 계절이라고 할 테지만, C에게는 나무들이 헐벗는 계절이었다.
보슬비가 내렸던 지난밤에 비해 하늘이 높고 푸르렀다. 구름이 하나둘 떠가는 듯 천천히 창공을 유영했다. 커다란 구름 몇 개가 상공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옆집 아줌마가 가꾸는 다마스크 장미가 바람결에 자신의 향을 묻혔다. 저번에도 맡았던 꽃 냄새였다. C는 깊게 심호흡하며 두 팔을 위로 쭉 뻗었다. 허리를 옆으로 돌리기도 하고, 무릎을 굽혀 굳은 근육을 이완시켰다. 윌프레드가 크게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가 밖에까지 들려서 C는 목을 젖혀 스트레칭을 하면서 은근슬쩍 그를 흘겨보았다. 윌프레드는 바보상자만을 보고 있었다.
“지금 구매하시면, 3+1 이벤트의 일환으로 상품 하나를 더 드립니다.”
한결같은 홍보였다. 제값에 팔지 않고, 더 비싼 값에 개별 판매를 하면서, 3+1로 4개를 사야 원래 가격에 맞는 물품을 팔아댔다. 저런 걸 사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 싶었는데,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에버렛과 윌프레드는 이번 주에만 해도 벌써 호랑이 무늬가 그려진 카펫을 하나 구입했다. 사은품으로 딸려 온 싸구려 발 매트가 1층 욕실 앞을 차지하고 있었다. 매트는 흰색 벽과 나무 목재 바닥에 어울리지 않아 혼자만 동떨어져 보였다. C는 두 노인네의 안목에 혀를 차며 그곳에 젖은 발을 닦았다.
환히 열어둔 베란다 문을 통해 윌프레드가 뒤뚱거리며 걸어 나왔다. 밖에서 시원한 바람을 즐기고 있던 C가 자신의 시야 안에 있자, 영 못마땅했던 모양이었다. 하여튼 성격이 배배 꼬인 영감이었다. C는 두 노인네가 언제쯤 집을 나갈지 홀로 내기를 하고 있었다. 스트레칭이 끝나면 방으로 올라가서 어제 하다 만 숙제를 끝마치고, 바튼에게 숙제 검사를 받고…. 제 일과를 정리했다. 오늘은 어떤 젤라토를 먹으면 좋을지 고민하며 젖은 흙에서 올라오는 미세한 냄새에 집중하려 슬며시 눈을 감았다.
C는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육체 안에서 공명하는 생명의 소리를 찾아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그가 한참 세상을 적시는 늦여름과 초가을의 중간 지점에서 감성을 찾고 있었다. C의 뒤까지 성큼 다가온 윌프레드가 음흉한 속내를 숨기며 뒷짐을 지었다. 그는 C의 왼쪽 아킬레스건을 겨냥하여 세차게 발을 굴렸다. 제 발목 앞부분으로 C의 아킬레스건 부분을 걸어 밀었다. 힘은 많이 필요 없었다. 뒤틀린 균형은 눈을 뜨기가 무섭게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놈. 나자빠져서는.”
윌프레드는 혀를 차며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낯으로 C를 깔보았다.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얼굴에 흙이 묻는 C를 비웃었다. 여전히 거실에서는 시끄러운 텔레비전 소리가 광고를 읊어대고 있었다. 아까와 똑같은 광고였다. 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지막 여성 M 사이즈까지 나갔습니다! 과장스럽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남자 쇼 캐스트가 시청률을 살폈다. C의 울분은 서서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동안, 심부, 단전. 해마에서부터 감정이 끓어올랐다. 들끓는 아드레날린이 혈류를 타고 돌았다.
“당신한테 달린 두 다리는 언제까지 온전할 줄 알고요.”
이제껏 C가 윌프레드에게 대들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온도의 노여움이 C의 심부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타들어 갈 듯 뜨거운 열감은 머리를 한 번 스쳐서 아래로 내려오며 색을 바꾸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다가도 오히려 균형을 찾아 호흡이 안정을 모방했다. 척추를 타고 푸른빛의 혐오, 증오, 저주가 흘러내렸다. C, 제일 뜨거운 온도는 사실 하얀색에 가까워. 바튼의 목소리가 C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이지러진 감정으로 얼룩진 두 눈동자가 윌프레드의 얼굴을 노시했다.
“이 버릇없는 애새끼.”
그리고, 그의 누그러진 기세를 관철했다. 당신이 늙어서 두 다리가 고장 날 게 아니라면, 그 이유에는 내가 있을 줄 어떻게 확신하냐는 듯한 경고. 윌프레드는 그 순간, C가 자신을 해할 수 있는 존재라고 의식했다. 자신이 키우고 있는 것이 인간의 거죽을 쓰고 있지만, 짐승보다 못할 수도 있다고. 정작 C가 그에게 위해를 가한 것보다, 그가 C에게 위해를 가한 게 더 많은데도. C는 무릎을 털어내며 한 발씩 땅을 내디뎠다. 상처가 욱신거렸다. 지금, 고통은 그의 무표정한 분노를 추동할 뿐이었다.
C의 가슴이 크게 위아래로 왕복운동을 해댔다. 커진 동공으로 빛이 쏟아 들어왔다. 그 거뭇거뭇한 구멍 속에는 산들바람이 호화롭게 감싸는 잔디밭과 푸르르게 펼쳐진 물빛. 꼬리를 위로 쭉 펴고서 앞으로 나아가는 고양이. 흔들리는 갈대. 노래 부르는 꾀꼬리. 자신을 등지고서 멀어지는 늙은 남자. 저 늙은 남자. 그뿐이었다. C는 그 남자가 산책로로 한참 빠져 더 이상 자신의 시야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C는 마른 입술을 벌려 짧은 단어 하나를 내뱉었다.
“모든 상품 전부 매진입니다! 올해 판매한 물품 중에 제일 단시간 매진이네요. 그렇죠?”
저 멀리 텔레비전에서 감격에 찬 남성의 음성이 C의 말을 삼켰다.
10
오후 4시에서 5시로 넘어가는 그 절반의 시간, P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보다 일찍 귀가한 윌프레드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소파에 몸을 묻고서 불시착 외계인, 정치적 음모론 따위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윌프레드와 C는 P가 오기 전까지 서로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윌프레드는 나이를 먹을수록 뒤끝이 길어졌다. C가 방에서 숙제 중인 걸 뻔히 알면서 텔레비전 소리를 계속해서 키웠다. 부엌이 쟁쟁 울릴 정도로 소리가 커지자, 에버렛이 윌프레드에게 소리를 줄이라며 야단쳤다.
방에서 P가 오기를 여태 기다리고 있던 C는 P의 모습이 창문 밖으로 보이자, 반색하며 뛰어왔다. 윌프레드는 C가 뛰어가는 장면을 보고서 거실에서 크게 고함을 질렀지만, 정작 본인이 키운 텔레비전 소리에 묻혀 복도 쪽에선 들리지 않았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계단에서 날아온 C가 P의 위로 엎어졌다. 빌어먹을 발 매트가 욕실 앞이 아닌 현관 앞에 놓여 있었던 탓이다. C는 하늘을 날며 생각했다. 미친, 비도 안 오는데 누가 매트를 옮긴 거냐고. 그는 하늘을 날며, 그대로 추락했다. P의 골격은 C가 생각했던 것보다 듬직했고, 예상했던 대로 살이 없어서 딱딱했다.
C는 P의 품에 고개를 묻은 채 툭, 주먹으로 그의 허리를 약하게 쳤다. 목덜미까지 붉어진 C는 P의 가슴팍 아래에 제 얼굴을 숨긴 채로 투정을 부렸다. 늦었잖아…, 편지만 부치고 바로 온다며. 그렇게 칭얼거리면서도 양팔을 들어 P의 허리를 껴안았다. 사람이 전해주는 온기. 제게로 돌아와 줄 사람. C가 어리광을 부려도 받아줄 사람. C의 미성숙함을 기꺼이 안아줄 사람. P는 C의 등을 서늘한 손으로 살며시 쓸어주었다. 서늘하고 시원한 감각은 그 무엇보다 따스한 애정을 담고 있었다.
P는 C의 등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토닥였다. 그러곤 느지막이 그의 등에 짧게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C가 헷갈리지 않도록, 정확히 알아주도록. 미안해. C는 P가 한 글자, 한 글자 자신의 등에 써 내려갈 때마다 조금씩 상체를 꿈틀거렸다. 애벌레가 등에서 춤추는 것 같아. C는 이윽고 붉은 낯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음을 뚫고 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음을 주고받았다.
이렇게 행복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면, 둘은 분명 젤라토를 먹으러 집을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둘은 그날 젤라토를 먹으러 나가지 못했다. C의 팔에 든 멍을 P가 뒤늦게 발견했던 탓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던 멍이 푸르뎅뎅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하긴 안았을 때는 보이지 않는 각도에 있으니 몰랐겠지. C는 멍이 든 줄도 몰랐다고 대꾸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고 말이다. P는 그렇지 않았다.
[ 어디서 넘어진 거야. 가서 약 바르자. 또 다른 데, 다친 건 없어? ]
P가 걱정해 주는 건 좋았다. 관심이니까. 하지만 C는 P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윌프레드가 그랬다느니 구구절절 설명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C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이 상황을 모면하고 젤라토를 사러 나가고 싶었다. C는 손으로 침대 시트를 밀더니 P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왼손으로 멀쩡하게 잘 붙어 있는 다리 쪽의 허벅지를 두드리곤, 의족을 착용하고 있는 쪽의 허벅지를 순서대로 두드렸다.
“너 나갔을 때, 스트레칭하다가 넘어졌어. 무릎이 까지기는 했지만, 피는 안 나니까 괜찮아. 이쪽도 딱히 아프진 않고.”
P는 집요하게 상처를 확인하려고 굴었다. C는 그게 귀찮았다. P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었을 때, 자신보다 훨씬 큰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웠을 때. C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윌프레드가 C에게 한 번씩 손찌검하던 걸 몸이 인식했나 보다. P는 C의 반사적인 행동을 보고선,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책상에 내려놓았던 수첩을 황급히 집어 들었다. C는 P에게 못 보여줄 걸 보여준 기분이었다. 자신의 치부를 있는 대로 깡그리 긁어서 털어낸 기분이었다. 자존심이 상하다 못해 화가 났다.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순전히 화풀이였다. 냉랭한 눈빛으로 P를 쏘아보며 상대에게 어울리지 않는 적개감을 표현하는 것도, 자신이 상처받은 영혼이라 토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C는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의 멋진 모습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P에게 이런 꼴을 보여야 한다는 게 수치스러웠다. 누군가에게는 본능적인 방어일 뿐인 게, C는 학습되었다는 그 사살이 초라해져서, 그래서 화가 났다.
P는 수첩에 [ 정말 미안해.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다가가서. ] 라고 적어 보였다. 평상시의 정갈한 글씨체가 구겨져 있었다. C는 P가 자신을 위로하려고 드는 게 싫었다. 다 이해한다고 구는 그의 태도가 삽시간에 미워졌다. P의 다정미는 상대방을 한없이 날아오르게 했다가, 그대로 수렁에 곤두박질치게 했다. P의 잘못이 아니라, 그의 손길을 받고 있으면, 그의 다정다감한 말씨를 들으면 나의 모남이 더 잘 보였던 탓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탓이라고 하는 P에게 그래, 다 네 탓이라고 원망하고 싶었다. C의 왼쪽 눈꺼풀이 멋대로 씰룩거렸다.
P는 수첩을 내려놓고서 아주 천천히, C가 원한다면, 자신을 충분히 밀어낼 수 있도록. 사육사가 맹수를 진정시킬 때 서서히 다가가듯 신중하게 대했다. 그리곤 껴안았다. 미안하다고. P는 포옹으로 얘기했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P는 C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괜찮다고 달래주었다. C가 말하기 싫다면, 그 말하기 싫은 감정까지도 P가 끌어안았다. C는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할 거면서 관대하게 구는 P가 미웠다. 그의 마음이 넓어서 미웠다. 그가 자신의 곁에 계속 남아주지 않을 걸 알아서 미웠다. C는 P를 껴안지 않고 옹골지게 주먹을 쥐었다. 그 주먹으로 P의 등을 때렸다.
같은 자리를 때리고, 또 때려서 C의 뭉툭하게 선 뼈마디가 등허리에 닿을 때마다 P는 통증을 느꼈다. C의 팔에 든 것보다 더 푸르고, 보라색의 멍이 생기고 있었다. C는 P를 원망하며 주먹으로 때리면서도, 어쩐지 제 마음속에도 멍이 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심장은 P의 서늘한 손짓에 푸르게 물들어 점차 원래의 템포를 찾아왔다. P가 알려준 것처럼, 서로의 속도에 맞추어, C는 P의 가슴께에서 두근거리는 맥박을 들었다.
그것은 꼭 제 것처럼 둥둥거리며 크게 뛰다가, C가 습한 입김을 그의 흉부에 내뱉을 때. C의 주먹이 점차 펴져 등을 끌어안을 때. 그의 베이지색 카디건이 손안에서 완전히 구겨져 엉망이 되었을 때. C의 심박수에 맞추어 뛰고 있었다. 같은 음으로, 같은 진폭으로. 같은 소리로. C는 입을 앙다물고서 두 팔로 P를 끌어안았다. P는 C를 제 품에 감추듯 품어주었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C는 P에게 제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변명을 덧붙이지 않고, P도 그에게 온화한 손길로 괜찮다고 답했다.
그날의 밤은 유난히 길었고, 따스했다. P의 좁은 싱글 침대에 몸을 구기고 함께 밤을 보냈다. 자신을 위해 정자세로 누운 게 아닌, C를 보호하듯 옆으로 누운 P가 C를 바라보았다. C는 빨리 눈이나 감으라고 말했다. P는 알겠다고 입 모양으로 답했다. C는 P의 움직이며, 답하는 입술을 쳐다보다가 그동안 P에게 숨기고 있던 진실 하나를 고했다. 나 사실 네가 하는 수화 다 알아들었어. 모르는 척했을 뿐이야.
P는 역시나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자애로운 미소로 작게 소리 없이 웃으며 그의 새하얀 손으로 답했다. 괜찮아. 다행이다. 네가 나와의 기억을 잊지 않아서 다행이야. P는 오히려 C가 과거에도 자신과의 기억을 소중히 여겨주었다는 것에 감복했다. C는 대답 없이 그의 품에 머리를 묻었다. 이불을 찾듯 그의 품에 머리를 집어넣고 눈을 감았다. P는 그의 등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여전히 벗어나려면 벗어날 수 있게, C가 자신에게서 안락함을 느낄 정도로만 그에게 제 애정을 전했다.
11
한 달이란 시간은 둘의 헐거웠던 포옹만큼이나 틈이 많았다. 그 틈 사이로 시간이 쏜살같이 떨어져 내렸다. 모래와 바람. 늦여름의 마지막 추억이 되어 빠져나갔다. 아이스크림 아저씨와 친해진 만큼, 둘이 함께 현미경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본 만큼. C의 비너스를 보고 P가 감탄해 준 만큼. 둘의 곡은 여전히 이름이 없었지만, 무제인 채로도 마음에 들었다. P가 돌아가던 날, C는 멀어지는 택시를 보고서 백미러에 자신이 더 이상 비치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잠자코 서 있었다.
P가 떠난 자리는 그의 존재가 한 달 사이 C에게 스며든 만큼, 딱 그 정도로 컸다. C는 P가 금세 보고 싶었다. P가 머물렀던 방에서는 아직 P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P가 생활했던 흔적이 열린 창틈 사이로 자꾸 새어 나갔다. 그가 들고 다니던 수첩, 읽던 책. 그가 쓰던 연필과 볼펜. 그가 누웠던 침대. 그가 앉았던 의자. 쓰지 않는 침대는 시체가 덮을 법한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 C는 천 위에 올라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P와 함께 잠들었던 그날을 떠올렸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제 잠버릇 때문에 침대 끄트머리에 겨우 걸려서 이불을 다 뺏긴 채로 떨고 있던 P의 모습이 우스워 아침부터 한바탕 웃어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P가 오지 않았다면 쌓지 못했을 추억이었다. 결국 C의 삶에 있어서, 이곳에서 계속 생활할 거라는 건 변함없지만. C는 P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많은 것들이 제 속에서 변했음을 깨달았다. 벌레가 파먹어서 홈이 생긴 천장을 보며 C는 눈을 감았다.
C는 다음 날, 윌프레드와 에버렛이 떠난 시간을 틈타 홀로 응접실에 앉았다. P를 위해 비켜주었던 자리도 자신이 모조리 차지했다. P가 치던 오른손의 역할도 자신이 자처했다. 도와 솔을 번갈아서 치는 손이 능숙했다. 변주에 변주를 얹어 하나의 푸가-하나의 성부(聲部)가 주제를 나타내면 다른 성부가 그것을 모방하면서 대위법에 따라 좇아가는 악곡 형식.-를 만들었다. P와 C가 만든 노래. 우리의 음악. 이 음악의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서라도 P는 C를 다시 만나러 와야만 했다. C는 곡의 연주를 마치고서 창밖을 건너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자리 앉은 차분함은 P에게서 옮겨붙은 것이었다. 이제는 정말 건조하고도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C는 타협했다. 진행자도, 반론자도 없는 토론회에서는 우승자가 없었다. 집안에서, 마을 안에서 홀로 배운 것보다 다채로운 온도를 경험했다. 세상은 차갑고 동시에 따스했다. 차가워서 따스했다. P와 함께하며 이중적인 온도에서 안락함을 느꼈다. 함께했기에 따스했으나, 그 대신 그가 떠난 빈자리에는 웃풍이 불었다. 이것이 성장이었다. 온량(溫涼)한 성장. 타협하지 않더라도 체념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C는 체념하지 않았다. 타협했다. 추억, 딱 그 정도로. C는 눈을 내리깔아 어스름하게 핀 제 그림자를 하감했다. 그러고는 P가 어느 날 아침 누군가에게 했던 것처럼 연락을 보냈다. 편지가 아닌 문자로.
[ P, 나를 이곳에 두고 가니까 어떤 기분이야? ]
P가 자신을 계속 생각하도록. 자신과 함께 지냈던 이 시간을 잊지 못하도록. 가끔 네가 내게 준 여백과 늦여름의 달콤함을 생각하며 자신보다 더 서늘함을 느끼도록. 이를 스치던 젤라토의 차가움을 그리워하도록. 내가 수첩에서 찢어낸 그 장을 돌려받지 못해 찢어진 자리를 몇 번이고 들춰보기를. 한 달의 여백이 더 이상 찰나의 의미를 보유하지 못하도록, C는 P에게 상처를 남겼다. 남에게는 보이지 않고, 다정함보다 더 오래 남을 상처와 모난 진심을. 더 무뎌지고, 더 세상에 무던해지기 위해서,
[ 다음에 또 놀러 와. ]
자신의 진심을 솔직히 고했다. 자신의 모진 면을 다 받고, 인내할 사람이 그뿐이라서……. 책 사이에 끼워진, P의 그림이. C가 해맑게 웃으며 메리와 잔디밭에 누워있는 P의 그림이 바람결에 산들거렸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작업하면서 무척 즐거웠답니다.
글의 저작권은 델먀에게 있으므로 무단으로 복사하는 행위는 하지 말아주세요.
커미션과 연성교환 신청은 카카오톡으로 받고 있습니다.
'글 샘플' 카테고리의 다른 글
To Heaven, (0) | 2024.11.26 |
---|---|
동야의 발색 (0) | 2024.05.13 |
달콤한 오후의 질투 (0) | 2024.05.13 |
舞蹈, 三. (0) | 2024.05.09 |
Intervening Falsehood (0) | 2024.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