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작업물입니다! >////<!! 너무 즐거운 작업이었어요!
※ 소재 주의 : 시체영득 및 훼손, 방화 등등
텍스트 전문 아래 슬라이드쇼로 정리한 PNG 파일도 있습니다.
舞蹈, 三.
―― 백화
제0막
西門
제1막
舞蹈, 一.
제2막
舞蹈, 二.
제3막
三舞蹈.
「 0, 西門 」
시커먼 잔향을 남기고 사라지는 매캐한 향연(香煙). 공중으로 피어오른 가느다란 곡선을 따라 코를 찌르는 첨예한 내음과 어두운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미려한 연기. 나는 그 향에 취한 듯 눈을 내리감고서 천천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장내에 자리한 쌉쌀하고도 날카로운 한기가 품 넓은 옷자락 속을 파고들었다. 깊은 심연이 시야를 가리니 그 냉기가 꼭 네 손길 같았다.
내가 이 한겨울에도 제대로 된 온열 장치 하나 없이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까닭. 네 육신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썩어나가니까. 죽음의 냄새가 어느덧 둔해진 내 후각을 희롱했다. 목에 검푸른 띠를 두르고 미동조차 하지 않는 시신이 모처럼 곱다 싶었더니 그마저 변덕이었다. 카즈마의 창백한 낯빛 위로 부분부분 검은 반점이 생겨 있었다. 지금이라도 자기를 놔달라는 듯이 말이다.
……괘씸해.
나는 여전히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깐 채 가늘게 뜬 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정교하게 짜인 나무와 나무 사이, 그 자그마한 갈피로 깊은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어스름을 등에 진 바람이 그 좁은 절리를 박차고 달려들었다. 틈바람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서풍이었다. 덧문을 박차고 들어오려는 듯 덜컹거리는 서풍의 신음이 영락없이 카즈마의 음성을 모방했다.
나는 차게 식은 카즈마의 사해 위로 손을 뻗었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의 목에 난 삭흔을 어루만졌다. 손끝에 삭상물의 요철을 따라 주름진 굴곡들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가 얌전히 제 손길을 느끼는 것이 퍽 마음에 들어 착하다, 그리 말했더니 카즈마는 꼭 자신이 고양이인 양 아양을 떨어대었다. 창밖으로 번쩍이는 빛이 허옇게 번졌다.
북쪽을 향해 일렬로 놓인 다다미. 그 다다미를 역으로 가로지르듯 놓인 요 위로 나는 천천히 몸을 누였다. 최근 들어 처리할 일이 많았던 탓에 온몸이 뻐근했다. 카즈마는 그런 주인의 노고도 모르는지 내가 이불을 끌어오는 순간에도 유순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영 버릇이 없었다.
나는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록 혈관이 퍼렇게 물들고, 입술이 청보랏빛을 띠어도 카즈마는 제 풍려한 속눈썹과 고운 피붓결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그것만큼은 칭찬할 만했다. 죽어서까지 제게 잘 보이려 노력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눈을 감고서 서서히 이 고요에 몸을 맡겼다. 시큼한 악취가 코끝을 스쳤다. 아무리 비싼 향유로 카즈마의 몸을 씻겨도 인간의 죽은 몸에서는 진물이 새어 나오기 마련이었다. 더럽고, 불쾌하고, 불손한 일임이 틀림없다. 거기다 요즘에는 오만하기까지 해서. 카즈마는 이런 추한 꼴을 하고서도 도통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내일이면 이 시끄러운 적막도 막을 내릴 테다. 그도 예전처럼 순종적으로 굴겠지. 자신의 말 한마디에 희비가 갈리고, 애원하고, 애처롭게 울부짖으며 사랑한다고 고할 것이다. 그러기로 약조했으니까, 주인의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나쁜 종에게는 훈육이 필요할 테다. 나는 부드러운 희소를 입매에 덧그리며 그의 고운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푹 자고 일어나렴, 카즈마. 내일은 피곤할 테니까.”
……네, 주인님. 창밖에서 문득 그런 대답이 들려온 듯했다.
「 1, 舞蹈, 一. 」
볕 드는 낮이었다. 한밤 내도록 불어대던 바람이 한결 수그러들었다. 하인들이 나와 엉망이 된 마당을 쓸고 있었다. 나는 모처럼 카즈마의 손을 잡고서 게이샤의 연주에 맞춰 발을 움직였다. 몇 번이고 가르쳐도 카즈마의 춤 실력은 도통 늘 생각이 없었다. 나는 카즈마의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서 제 어깨에 그의 몸을 기대게 했다.
본래는 춤을 추는 것도, 흥을 돋우는 것도 모두 게이샤들의 역할이었으나 그들은 도리어 입을 닫고서 연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입을 함부로 놀린다는 것의 대가를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카즈마의 발이 질질 끌려 그의 발톱 밑에서 피가 묻어나올 때까지 우리의 첫 번째 무도는 계속되었다.
“……카즈마, 제대로 잡아야지.”
한 박자 늦게 음악이 멈췄다. 흐느적거리며 제게서 떨어져 나가는 카즈마의 손. 결국 사람을 시켜 카즈마의 소매 위로 밧줄을 두어 번 두르고 나서야 그는 얌전히 나의 등을 껴안았다. 이미 사후경직이 일어난 몸은 고작 이 정도로 살이 패이지 않았다. 나는 나지막이 그를 타일렀다. 보는 눈이 있는데, 주인을 이리 속 썩여서야 어쩌겠니. 주인의 낯에 먹칠하는 용태였다.
“제대로 서렴. 이렇게 말을 안 들어서야 남들 앞에 선 주인님 입장이 곤란해지잖아.”
카즈마는 그제야 내 말을 새겨들은 듯 나의 왼팔을 조금 더 단단히 움켜잡았다. 나는 둥근 호선을 입꼬리에 매단 채 그의 등을 느릿하게 쓸어주었다. 잔혹하게 도륙된 인간들의 육신 100구면 사람을 하나 살릴 수 있다. 2주 전, 꿈결에 찾아온 한 노파가 내게 해주었던 말. 문득 그의 음성이 다시금 나를 그날로 이끌었다.
간밤에 웬 행상인가 했더니 그 노파는 대뜸 그 얘기부터 꺼냈다. 아득하게 낀 안개와 싸늘한 사위. 그가 자신을 우롱하는 거라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감히 어느 안전(案前)이라고, 자신을 농락하려 든단 말인가. 그런 내 생각을 노인이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곧바로 꿈에서 쫓겨나듯 깨어났다.
그리고 그다음 날, 그 노인은 자신의 수하를 대동하고서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이번에도 주위에 안개가 자욱하게 들어찼다. 마치 요괴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어 퍽 불쾌했다. 수하라고 하던 사내는 화살이 박힌 오오요로이를 입은 채 목에 누런 붕대를 감고 있었다. 노파가 그에게 손짓하자 사내는 내 앞에서 제 붕대를 풀어 보였다.
그의 붕대 아래, 크게 벌어진 피부 사이로 새하얀 뼈가 모습을 드러냈다. 끊긴 경동맥에서 피가 솟구쳐 바닥을 더럽혔다. 평소 같았으면 분명 언짢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환히 섞인 조소를 지어낼 수밖에 없었다. 목덜미를 타고서 소름이 섬찟하게 돋아났다. 알싸한 쾌감이 제 고요하던 심부를 거세게 울려댔다. 죽음도 별거 아니구나…….
나는 내 감정을 한 차례 눌러, 속으로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들이 왜 나를 찾아왔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결국 사기꾼이라고 한들 내게는 시체를 얻을 수 있는 기발한 생각이 있었다. 그들은 내 꿈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내게 아무런 대가를 원하지 않았다. 나는 그 점이 퍽 의문스러웠으나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내가 필요한 순간이 오면, 그들은 다시금 홀연히 나를 찾아오리라는 걸 나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날부터 매일 넉넉한 비용을 대고서 인부들을 전쟁터로 내보냈다. 새벽에 출발한 그들은 매일 밤, 전사자들의 육신을 수거해왔다. 나는 전사자들의 장례를 치러준다며 그들이 가져온 사체들을 뒷마당에서 불태웠다. 가끔은 시체를 수습하러 간 이들조차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고는 했으나, 그럴 때는 더 높은 품삯을 주고서 다른 인부를 새로 고용하면 되었다.
이러한 일정을 수행하는 데에 유독 곤혹스러운 점이 있다면, 악취가 옷에 밴다는 거였다. 환기를 아무리 시켜도 집안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와 인간 타는 냄새가 공존했다. 두 가지 악취가 멋대로 뒤섞여 이제는 다른 걸 같이 태우기 시작했다. 집안이 온통 향으로 가득해졌다.
나중에는 향을 분간하기 힘들어졌다. 어느 것이 좋은 냄새인지, 어느 것이 불쾌한 냄새인지. 다 똑같이만 느껴졌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감각이 망가져도 포기할 수가 없는 거다. 너는 나의 일부이며, 내 소유다. 내가 내치기 전까지는 나를 떠날 수 없는 소유물이자 나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게 사리를 흐리게 하는 유일한 존재.
인간들은 언제나 겉으로 보이는 면을 더 우상시하곤 했다. 내가 하는 이 일련의 장례 절차가 가문과 국가의 명예를 드높인다며 세간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일찍이 전사한 내 부모와 동생의 넋을 기리는 거라고 하지를 않나. 무지한 이들이 저들끼리 나를 칭송하고 다녔다. 나는 유골이 필요한 이들에게 누구 것인지도 모르는 이들의 재를 담아 보내주었다.
나는 죄를 쌓고 있었다. 카즈마를 되살리기 위해 필요한 육신과 죄는 모두 준비되었다. 드디어 오늘 밤, 그가 내게 되돌아온다. 나는 나와 그를 묶어둔 밧줄을 풀었다. 분명 어젯밤 그에게 푹 쉬어두라고 했는데, 카즈마는 고작 춤 한 번 췄다고 지쳤는지. 내게 붙어서 애교를 떨어댔다. 나는 그의 다리 사이로 오른 다리를 끼워놓고서 그를 부축했다.
게이샤들이 고개를 숙여 내게 정수리를 내보였다. 그들의 혈관 속에도 살아있는 혈액이 돌고 있겠지. 죄다 살아있는 시신이었다. 저들도 애초에 다 죽을 텐데. 죽어서도 살아갈 수 있다면, 사실상 죽은 후나 살아있는 지금이나 다 똑같은 게 아닌가. 죽음과 삶의 경계가 무너지니 나는 죽음까지 초월하는 절대자가 된 것이다. 따스한 햇발이 나의 눈가에 온기를 내려주었다.
「 2, 舞蹈, 二. 」
잿빛 구름이 가내를 뒤덮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매연이 자택의 담장 너머까지 넘실대며 퍼져나가고 있었다. 아가리를 번들거리며 꿀렁이는 불길.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었던 마지막 100번째 사체가 드디어 보유스름한 재가 되었다. 나는 모든 방문을 훤히 열어둔 채 카즈마를 껴안고서 그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일어나야지, 카즈마. 네 주인님이 이렇게나 너를 기다리고 있잖니.”
나는 탁한 연기에 휩싸여 높은 곳에서 세상을 굽어보듯, 나의 품에 안긴 카즈마를 세세히 부감(俯瞰)했다. 숨을 들이켜는 매 찰나 호흡기가 타는 듯 고통스럽고, 단순히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고문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는 차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나는 네가 도로 생을 되찾는 과정을 느긋하게 감상하고 싶었다.
그런 내 기대에 응하듯 뿌연 시야 속, 카즈마의 눈두덩이 아래 무언가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맥을 짚었다. 미약하게나마 요동치는 고동. 나는 그의 자그마한 소리 하나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의 잇새에서 바람이 새어 나왔다. 사그라들었던 생명이 다시금 호흡하고 있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비강 속으로 침투한 흑연(黑煙)이 연신 나의 폐부를 매섭게 찔러댔다. 금방이라도 기침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의식적으로 기도를 좁히고서는 몸 안의 떨림을 단전 아래로 억눌렀다. 덕분에 기껏 미소를 장식해 둔 입매가 비뚜름히 기울고 있었다.
카즈마의 속눈썹이 떨린다 싶더니 이내 오랜 시간 숨죽이고 있던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 속 나는 그 누구보다 말간 미소를 띠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 때문일까. 그의 연색(鉛色) 눈동자에 강렬한 두려움이 일렁거렸다. 붉은 기운이 나의 상 위로 몇 번이고 아른거렸다. 또 다른 감정이 그에게서 막 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원망이었다. 그의 동공에서부터 짙은 원망이 우러나고 있었다.
이건 좀 새로웠다. 카즈마가 나를 원망하고 있다니. 그가 미간을 좁히고서 눈매를 구겼다. 눈가를 발갛게 물들이고서 이를 악문 그는 나를 다시 볼 수 있어서 반가운 기색이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은 나를 원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아직 사랑하고 있었다. 홀로 마음을 다독이는 순간조차 지금처럼 괴로웠다고. 도저히 자신은 그 고통을 버텨낼 수 없어서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그가 감정에 얼룩진 시선으로 내게 잠연히 토로했다.
나는 안타까운 탄식을 흘리며 그에게 비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 왼손으로 그의 입을 가로막았다. 원망은 카즈마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네가 나를 떠났던 거잖아. 나는 허락한 적도 없는데, 네가 나를 버리려고 했던 거잖아. 어떻게 감히. 네가. 나를……. 어떻게 종이 주인을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동안 감춰두었던 분노가 한순간 폭발하듯 흘러나왔다.
나는 그를 차디찬 마루에 내려두고서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그의 입술을 세게 틀어막았다. 따스한 온기가 손바닥 아래에서 거세게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그의 순을 틀어막고 그 어떠한 소리를 방색해도, 자잘한 웃음이 내 하순을 비집고서 병적으로 새어 나왔다. 나는 이내 허연 입김을 내뱉으며 그에게 환영 인사를 건넸다. 목소리가 보잘것없이 떨렸다.
“그래, 나도 이해해. 오랜만에 주인님 낯을 뵈니 얼마나 반갑겠니……. 다시 내 품으로 돌아온 걸 환영한단다, 카즈마.”
나는 그의 눈동자 위로 열띤 숨을 흘렸다. 나는 그의 눈가에 드리운 화염(火焰)을 몸으로 가려내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존재할 수 있는 건 오히려 나만이 되도록. 그리하여 네가 내 그림자 속에서만 살아가도록. 나는 다시 한번 이것이 사랑이라 명결(明決)했다. 사랑 이외에는 이 감정을 정의할 수 있는 게 없으므로 네 감정 또한 사랑이 맞을 테다. 내 아래에서 꿈틀대며 박동하는 네 모습이 꼭, 오늘 아침 우리가 함께 추었던 춤의 동작과 같았다.
「 3, 三舞蹈. 」
이건 제멋대로 주인의 품을 떠난 네가 거듭 내게 돌아오는 발소리요, 이건 네가 복에 겨워 내 가슴께에 뱉은 물기 어린 숨결이었다. 축축한 습기가 나의 입가를 적셨다. 카즈마는 그동안 얌전히 굴었던 게 전부 내숭이었던 것처럼 바닥이 무너지라 발을 굴렸다. 어느 순간 나는 카즈마의 몸에 올라타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언제부터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저 그가 애처롭게 나를 부르며 애원하는 모습에 구미가 돌았을 뿐이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카즈마의 안와가 붉게 물들면, 나는 그제야 그의 숨을 옥죄고 있던 양손에 힘을 풀어주었다. 그의 목에 남은 반항의 흔적을 내 것으로 덮고 싶다, 그 생각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던 것 같았다. 카즈마는 내가 그에게 허락하는 만큼만 호흡하고 있었다. 그가 완벽히 내 아래에서 통제되고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홍채를 들여다보았다.
“아……, 얼마나 기뻤기에 눈물까지 흘리는 거니.”
나는 지금 그의 죄를 씻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면죄부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 면죄부란 말인가. 나는 다만 이 일에 어떤 숭고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내 정신은 어느 때보다 맑았고, 내 가슴은 차분하나 그만큼 그를 연모하는 마음으로 들끓고 있었다. 이것은 때때로 소유욕이 되고, 통제 욕구가 되고. 종래엔 나조차도 나를 제어할 수가 없는 난봉꾼이 되었다.
저 자신을 다스리려고 해도 좀처럼 쉽지 않은 것이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 듯하면서도 도리어 비릿한 열감을 자아냈다. 내가 악취미인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인정은 쉬웠다. 카즈마는 내가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다시는 너를 놓치지 않을 거야. 나는 전처럼 부드럽게 잠소했다. 눈가에서 맥이 뛰었다. 나는 그의 목을 쥐고 있던 손을 완전히 놓았다. 그가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제대로 눈을 맞춰주렴. 오랜만에 뵙는 주인님이 반갑지도 않니?”
……나를 슬프게 하는구나. 슬픈 게 아니라 분노했다는 게 옳았지만, 카즈마는 내가 슬퍼했다는 것에 제법 놀란 듯했다. 나는 그의 턱을 감싸고서 억지로 시선을 맞추었다. 토악질이라도 하듯 눈물을 쏟아내는 그의 낯을 훑어내었다. 내가 네 덕분에 인내심이 늘었어. 머릿속으로만 중얼거렸다고 생각했는데 귓가에 내 음성이 윙윙거렸다. 카즈마의 목 위로 내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퍽 사랑스러워 그만 파안하고 말았다.
“……어째, 서….”
한참 뒤에야 거칠게 쉰 목소리가 내게 물었다. 가늘게 흩어지는 음성이 퍽 여리게만 느껴졌다. 너는 이 정도로 약하지 않잖아. 너는 더 잘할 수 있잖아. 무채색의 눈동자가 저물녘의 윤슬을 담고서 흔들렸다. 나는 그의 턱에서부터 목까지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서 그의 순을 물었다. 그의 의문을 삼켰다. 정갈하게 묶어둔 머리카락이 풀려 앞으로 죄 흘러내렸다.
좀처럼 딱딱하던 그의 입술이 오늘만큼은 취연하고 순했다. 엇갈린 두 색조의 눈빛이 그를 오롯하게 담아내었다. 한 차례 연한 살점을 깨물어 피를 내니 그의 도톰한 하순 위로 윤기가 흘렀다. 붉은 방울이 몽글하게 올라왔다. 나는 엄지로 그의 칠칠치 못한 입매를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뒤섞이는 머리칼. 손끝에서 번지는 짙은 생의 흔적. 달큰한 냄새가 났다.
“왜냐니.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 네게는 거짓에 불과했다면, 정말 유감이구나.”
“그, 그런 말이 아니었어요. 주인님께서는, 저를…, 제가…….”
카즈마. 죽은 너를 되살릴 만큼, 이 귀찮은 일들을 할 만큼이나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잖아. 입가를 가로지르던 미소가 단호히 그의 말을 틀어막았다. 위로 오른 입꼬리가 경련이라도 하듯 꿈틀거렸다. 카즈마는 협식(脅息)해서 나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아, 아직 그에게서 썩은 내가 나기는 했지만, 아마도 그건 집에서 진동하고 있는 냄새 때문일 테다.
카즈마가 내 아래에서 전율했다. 물 먹은 눈으로 나를 우러러보며 덜덜 떨리는 기대감을 숨기지도 못하고 고개를 점두했다. 그의 목에는 이제 푸르른 삭흔이 아니라, 나의 손자국만이 남아있었다. 그가 내게 토해낸 총 세 번의 긍정이었다.
1~15장
16~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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