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장문 연성교환 작업물입니다! 감사드립니다! >////<!! 모든 저작권은 델먀에게 있습니다!
달콤한 오후의 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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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잔등을 스치는 가을바람이 무척이나 선선한 날이었다. 하늘이 얼마나 맑고 창창한지 꼭 파스텔로 그린 그림을 보는 것만 같았다. H는 창문 밖을 올려다보며 오랜만에 느긋한 오후를 만끽하고 있었다. 프리랜서라는 직업의 가장 큰 장점은 오늘처럼 모든 게 완벽한 날, 갑갑한 회사에 갇혀 퇴근시간만을 고대하는 게 아니라, 편안한 집에서 소파에 몸을 묻고 느긋하게 여유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바로 그 점이 일터와 집의 분리가 어렵다는 단점과 직결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H는 일을 휘몰아치듯 끝내고 나면 찾아오는 과도한 에피네프린 분비와 아드레날린의 향연 속에서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과 압박 속에서 벗어나니 몸은 어느 때보다 가볍기만 했다. 진득한 고양감과 탈력이 H를 다정히 감싸 안았다.
머그잔의 매끄러운 감촉과 폴폴 올라오는 새하얀 연기. 풍부한 산미와 코끝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원두의 향. 고된 일을 끝낸 H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자그마한 보상이었다. 그가 집에서 부릴 수 있는 사치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었지만, 대부분 소소한 것에서부터 행복은 찾아오는 법이었다. 오늘의 보상은 뜨거운 우유를 데워 커피에 넣는 정도였다. 평상시라면 단순히 아메리카노에만 그쳤을 커피에 우유를 붓는 것 같은 사소한 변화에도, H는 자기 자신을 보살펴 주는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티스푼으로 커피를 한 번 더 저어 열 오른 잔에 입술을 대고 있으면, 이 포근하고도 건조한 자연 바람이나 흔들리는 커튼 따위에 H는 자신이 마치 고즈넉한 카페라도 온 듯했다. 미세한 주름 하나 없이 편안히 감은 눈과 입가에 떠오른 옅은 미소가 H의 기분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휴대전화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느긋한 재즈를 들으며 다리 위를 덮고 있던 담요를 허리 위로 끌어올렸다. 들고 있던 잔을 낮은 테이블 위에 내려두고 나면 혹여 커피를 쏟을까 봐 신경 쓰고 있던 미묘한 긴장감마저도 녹아내렸다. H는 전신에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끼며 흔흔한 한숨을 내쉬었다. 속눈썹을 간질이는 따사로운 햇발과 근처 가로수의 바스락거리는 단풍 소리가 뒤섞여 H는 점차 노곤해지고 있었다. 그때 문득 그의 귀를 즐겁게 해주던 음악이 멈추더니 작은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H는 자신이 등받이에 기대어 누운 각도나 소파의 눌린 정도를 포함해서. 이 모든 조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무겁게 내려온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고 싶지도 않았을뿐더러,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고 싶지도 않았다. 휴대전화의 진동은 두어 번 더 울리더니 이내 떨림을 멈추었다. 잠깐의 정적 끝에 다시 유려한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왔다.
H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두 팔을 제 허벅지 옆에 내려두고 있었다. 그의 작은 머릿속에서는 여러 생각이 오가고 있었다. 진동이 세 번밖에 울리지 않았으니 업무 메일은 아닐 테고, 그러면 카톡이거나 문자인 것 같은데…. F인가? F가 아니면 딱히 누군가 자신에게 연락해 올 일도 없었다. 오늘은 F도 오후 근무가 있는 날이니까. F려나. H는 으음, 작게 소리를 내며 두 팔을 위로 쭉 뻗었다. 포근포근한 털 담요가 그의 옷감을 타고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H는 책상 위로 오른손을 뻗으며 허공을 더듬었다. 손끝에 무언가 닿자, H는 가늘게 눈을 뜨며 제 흐릿한 초점을 한곳으로 모았다. 손에 닿은 것은 휴대전화가 아닌 머그잔이었다. 손에 힘을 빼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대로 잔을 엎을 수도 있었다. 등골을 스치는 아찔함에 H의 잠은 금세 달아났다.
F한테 또 혼날 뻔했네. H와 관련된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F였으니, 그가 만약 화상이라도 입었다면 F는 그에게 잔소리를 하면서도 H의 상처가 걱정되어 한동안 그가 주방에 오지도 못하게 할 게 눈에 선했다. H는 뒤집어 둔 휴대전화를 들어 화면에 미리보기로 뜬 연락을 확인했다. 그의 예상과 달리 발신자는 F가 아니었다. 자주 연락할 일은 없었지만, 또 연락이 오면 즐겁게 대화할 수 있을 정도의 친분. 대학교 동기였다. 얘가 무슨 일로 연락을 다 했지? 특별한 일이 있어야 연락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살다 보면 각자 먹고사는 게 바빠 연락이 끊기는 경우가 많지 않나. H는 잠금을 풀고서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았다.
[ H, 오늘 만나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예정대로 카페 P에서 3시에 만나는 거다. ]
“…어?”
들으면 안 되는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H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 19분이었다. 소파에 폭 기대어 있던 상체가 앞으로 확 쏠렸다. 그 반동 탓에 그의 무릎에 걸쳐져 있던 담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H는 다급히 예전에 그와 대화했던 내역을 훑어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아, 한 달 전에 잡았던 약속이었구나. 바빠서 까먹고 있었네. 왜 약속장소는 하필 F가 일하는 곳이람. H는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씻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는 동기들인데 이런 꼴로 나갈 수는 없었다. H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H의 휴대전화 액정 위로 문자가 하나 더 떠올랐다. F의 연락이었다.
[ 오늘 날이 무척 좋네. 우리 저녁에 산책하러 나갈까? ]
***
H가 F의 문자를 본 건, 그가 부랴부랴 집을 나와 미리 불러둔 택시에 탑승하고 난 후였다. 저녁 산책? 오늘은 F가 5시쯤 퇴근한다고 했으니까. 퇴근시간에 맞춰서 헤어지면 되려나. 카페에서 2~3시간 있는 건 민폐일 텐데…, 그렇다고 잠시 나갔다가 애들이랑 저녁을 먹고 카페에 돌아오기에도 시간이 애매하네. 애초에 나는 왜 약속을 3시로 잡은 거지. H가 그런 고민을 하다 보면, 일찍이 그에게 약속이 있었다는 것을 일깨워 준 친구의 연락에 그가 미처 답을 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H는 급히 F에게 [ 좋아! 그런데 나 오늘 대학교 동기들이랑 F가 일하는 카페에 갈 거야. 3시에! ] 라고 보내놓았다. 두 사람에게 모두 연락을 보내고 나면 H는 휴대전화를 제 주머니에 넣고서 밖을 내다보았다. 어우, 정신없어. 너무 허겁지겁 준비를 했더니 그사이에 벌써 지친 것만 같았다. 택시가 잠시 멈춘 사이, H는 나들이를 나온 한 가족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잔을 엎질렀다거나, 약속에 나가지 못한다거나. 제시간에 마감을 마치지 못한다거나. 전부 아슬아슬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 무사히 넘기지 않았나. 어찌 보면 오늘, H의 기분은 대체로 좋은 편이었다. 오늘 하루 럭키하진 않을지라도, 운이 없는 건 아닐지도?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무난하게 넘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근거 없이 막연한 컨디션이었다. H는 부모의 손을 꼭 잡고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보며 한 차례 숨을 골랐다. 오늘 놀러 가기 딱 좋은 날이지. 집에만 있기에도 좋은 날이고. 놀이공원에도 사람이 많을 것 같아. 평일이기는 하지만, 그러고 보니까 대학생들은 지금쯤 중간고사 시즌이려나. 그러면 사람이 적을 수도 있겠네. 이런 날 바다를 보러 간다면 참 좋을 텐데. 물이 차갑기는 해도 맑겠지.
그렇게 시작한 상상이 그와 F가 저 멀리 해외로 여행을 나가는 망상까지 다다랐을 때, 택시가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시간은 오후 2시 58분이었다. 나름 약속시간보다 2분이나 일찍 도착한 것이니 이마저도 안전선이었다. H가 카페에 들어서자 그를 알아본 동기들이 일제히 그에게 아는 체를 했다. 개중에는 못 본 사이에 머리를 염색한 친구도 있었고, 스타일이 많이 변한 이도 있었다. 그 반가운 얼굴들에 H의 만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H는 자신을 반기는 시선이 그곳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일찍이 알아차렸다. 또 다른 시선 하나가 그들보다 조금 뒤에서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F가 주문받은 커피를 내리다 말고 그에게 카운터 눈인사를 건넸다.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눈매가 반가움을 표하고 있었다. H 또한 그에게 짧게 목례하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로 차차 걸음을 옮겼다. 눈빛에 담긴 애정을 숨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티가 나는 법이었다.
“안녕, 얘들아. 오래 기다렸어?”
“아니. 우리도 온지 얼마 안 됐어.”
“그러게, 다들 일찍 나왔더라. 주말도 아닌데 다들 일 없어?”
“너…, 왜 나를 순살로 만들어?”
H가 그들에게로 다가서며 말을 건네자, 자리는 삽시간에 시끌벅적해졌다. 카페 P는 규모가 여느 프랜차이즈만큼 큰 편은 아니었기에 그들의 조잘거리는 목소리만으로도 벌써 활기가 넘쳤다. H는 자신을 위해 비워둔 자리에 앉다가 그들의 실없는 잡담에 크게 낭소하고 말았다. 어쩜 예전이랑 다들 변한 게 없었다. 평소에도 연락을 아예 주고받지 않은 것은 아닌지라 서로 어떤 직장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지내는 정도는 다들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가볍게 장난을 치는 거였다. H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서 친구들과의 대화에 점차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5분 정도 지났을까. F가 H의 친구들이 주문한 음료를 가지고서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F가 음료를 하나씩 내려놓자, 말소리가 줄어들었다. H의 시선이 자연스레 F에게로 향했다. H는 문득 그때까지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자신이 음료를 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친구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아, 나 음료 시키는 걸 깜빡했네.”
“헉…, 나도 깜빡 잊었지 뭐야. 미안, 미안. 지금 하나 더 시키자. H이, 너 뭐 좋아했었지?”
“그러실 필요 없어요. 이건 여러분께 드리는 서비스입니다.”
F가 마지막 잔을 H의 앞에 내려두며 대화에 슬며시 끼어들었다. 어느샌가 H의 몫까지 포함된 총 6개의 음료와 생크림과 시럽이 듬뿍 올라간 허니브레드가 테이블 위에 예쁘게 놓여있었다. F가 자신들에게 말을 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친구들이 당황이라도 한 건지 테이블 위와 F의 얼굴만 번갈아서 응시하고 있었다. 그 찰나의 침묵을 깨뜨리려 H가 입술을 달싹였지만, 정작 먼저 반응을 내보인 건 H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K였다. 그는 F의 센스에 크게 감동이라도 한 듯 과장된 움직임으로 두 손을 짝 소리 나게 맞물렸다. H는 제 옆의 인영을 바라보다 그대로 입술을 다물었다. 그의 행동에 조금 머쓱해진 탓이었다. H는 아랫입술을 약하게 물고서 웃음을 참아내려고 했지만, 이내 소리가 조금 새고 말았다. 그게 무슨 시발점이라도 되는 양, 한 차례 어색함이 가시자 그들은 다시금 파안대소하였다.
“정말요? 세상에. 이런 걸 다 주시고…. 감사합니다.”
“저희 이거 안 시켰는데, 음료에다 빵까지 주시는 거예요?”
“딱히 저희가 해드린 것도 없잖아요. 정말 감사히 먹을게요.”
사회성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저런 아부가 늘어난 걸지. 친구들은 사전에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아양 떠는 것도 일색이었다. 어떻게 보면 고된 직장 생활에 찌들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는 냉큼 잡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탓이었다.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 H가 보기에는 이 광경이 그리 싫지 않았다. H는 F가 자신을 배려하여 자신이 마실 음료를 따로 제공해 준 것도 고마웠지만, 친구들과 좋은 시간 보내라는 뜻에서 서비스를 내어줬다는 것 또한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섬세하고 배려심 넘치는 사람. 그런 F를 보고 있으면 괜스레 좋아하는 마음이 벅차오르기 마련이었다.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F의 행동은 H, 그 자신의 자존감을 북돋아 주는 역할도 톡톡히 했다. 마치 저희 H 잘 부탁드려요, 같은 기분이랄까. 이렇게 다정하고 눈치 빠른 남자가 자기 연인이라 어쩐지 뿌듯하고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퍽 유치한 생각이었다.
일찍이 H는 F가 자신의 남자친구라고 그들에게 소개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친구들은 왜 F가 자신들에게 서비스를 주는 것인지 명확히 알 턱이 없었다. 그러니 이러한 뿌듯함도 오롯이 H 홀로 간직할 감정이었다. H는 F가 자신의 연인이라는 걸 주변에 밝힐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이를 사랑한다는 건 이런 거였다. 연인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밝힐 수 없는 관계. H는 괜스레 입안이 텁텁해진 기분이 들었다. 나오기 전에 커피를 마시고 나와서 그런 걸까? H는 자신의 마음이 왜 이런 건지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외면하려 했다. 항상 잘해오던 건데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해질 이유도 없었다. F도, H도. 이 연애가 결코 공개적일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서로를 무엇보다 생각하기에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거였다. 상반되는 두 감정이 한순간에 교차한다는 것은 간혹 사람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A의 농담은 타이밍이 참 좋지 않았다.
“얼굴도 잘생기셨는데, 이렇게 센스가 좋으시니 여자친구분께 많은 사랑 받으시겠어요.”
“정말 고마워요, 아무로 씨. 이렇게까지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H가 슬슬 F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했을 때, 문득 맞은편에 앉은 A가 테이블 위로 팔을 올리더니 턱을 괴고서 아부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바로 F의 외모에 대한 칭찬이었다. H는 제 앞에 놓인 잔을 쥐고서 F를 바라보았다. 서로가 곤란해질 상황은 결코 원하지 않았다. H의 입가에 차분한 미소가 자리했다. 내숭과는 거리가 먼 H이었으니 일종의 소소한 질투였다. 그를 알아차린 이가 이 자리에 몇이나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적어도 F만은 눈치라 빠른 사람이니 충분히 H의 감정을 읽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애초에 F를 보는 H의 눈빛을 간파한 이도 없지는 않은 듯했다. A의 옆에 앉은 R이 A의 허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외모 얘기나 연인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 모르냐는 식의 암시였다. H은 F를 올려다보며 잠소하였다. 이렇게 갑자기 소개를 하게해서 미안하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었다. F는 그 뜻을 알아차린 것인지 자연스레 친구들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F라고 합니다. H 씨와는 친분이 있어서 드리는 거니까 편히 쉬다 가세요.”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 아까 H, 여기 들어올 때 카운터 보면서 웃더라고.”
“뭐야, 그런 건 또 언제 봤대.”
K가 이제야 이유를 알았다며 능청스레 제 관찰력을 자랑했다. 원체 대학교 때부터 누군가와 어울려 다니고 나서는 걸 좋아하는 이였던지라, 이럴 때는 오히려 도움이 되는 친구였다. H가 K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툭 쳤다. K는 왜? 라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쯤 되자 A도 다시 대화에 끼어들어야겠다 싶었나 보다. A는 F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마치 공손히 인사라도 하는 듯했다. F가 사람 좋은 신소를 짓고서 짧게 괜찮아요. 라고 답했다. 대답을 들은 A는 눈웃음을 짓더니 곧 H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K의 말에 한마디 더 얹고자 함이었다. 이렇게 잘생긴 지인이 있으면 우리한테 빨리 소개시켜 줘야지. 설마 우리한테는 소개해 주기 싫어서 그랬던 건 아니지? 그는 손을 옆으로 한 번 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친구들이 옆에서 그런 거구나? 라며 호응을 하자 F는 이쯤에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입매에 떠오른 호선이 순수한 연정을 품고 있었다.
“그럼 친구들이랑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H 씨.”
“응, 고마워요. F 씨.”
친구들의 짓궂은 농에 굳이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지 H는 F에게 눈짓을 건네며 짧게 감사를 표했다. 바라지 않았건만 복잡한 감정은 점염되듯 H에게서 F로 점차 퍼져나갔다. F는 천천히 카운터로 걸음을 옮겼다. 카운터에는 E가 장난기 담긴 눈망울로 그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포착한 포식자와도 같은 눈빛이었다.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들킨 이래로 틈만 나면 F에게 여자친구분은 이제 괜찮으세요? 라며 안부를 묻던 E가 이번에도 제 나름대로의 추리를 해본 모양이었다. F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E의 질문 세례를 받을 준비를 하는 셈이었다. F는 자신의 앞치마를 털듯이 주름을 펴고는 카운터 뒤로 들어섰다.
“흠, 저분이 바로 F 씨의 베일에 가려진 여자친구분이신 거죠?”
“그런 거 아니에요.”
거창한 수식어였다. 순전히 F를 골리기 위한 단어조합이었다. E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H이 정말 F의 여자친구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촉이 너무 좋은 탓에 오히려 F에게 상처가 될 거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한, 무지의 모순이었다. E는 왼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고서 F를 향해 쏘아 보였다. F는 손을 들어 자신을 향해 겨눈 총구를 아래로 내려주었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낮게 웃어 보였다. 한동안 이 얘기만 하게 생겼네. F는 E를 한 번 바라보다 곧 매장 내로 관심을 돌렸다. E가 다른 질문을 하기 전에 손님들이 어서 추가 주문이나 해줬으면 좋겠다는 속내였다. 일부러 그런 티를 내는 것도 있었지만, E는 어림도 없다는 듯 그의 곁에 서서 다른 주문이 들어올 때까지 H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었다.
***
F가 한 번씩 H를 돌아보며 일을 이어 나간 지 이제 막 한 시간 반쯤 지났을까. 슬슬 질문거리도 떨어지고, 더 이상 물어보는 건 선을 넘는 거라고 여긴 E도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F는 설거지도 끝난 겸, 컵을 닦으며 H을 가만 건너다보았다. 마침 H이 자신의 상처에 대해서 친구들에게 말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자신의 앞머리를 위로 들어 올려 보이더니, 옆에 있는 K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F는 그의 입모양을 읽어보며 작게 따라 중얼거렸다. 만져볼래?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서 작게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왜…, 왜 이성인 친구에게 흉터를 만져보라고 하는 거지? 그러고 보면 저 사람은 왜 굳이 자기 옆자리를 비워둔 거야…. 컵을 닦고 있던 그의 손에 선명히 핏줄이 섰다. F는 애써 시선을 거두며 자신이 닦고 있던 컵을 내려다보았다. 컵은 반짝반짝 빛나다 못해 투명해질 지경이었다. 옆에서 그를 지켜보던 E가 F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러다가 컵으로 거울 만들겠어요.”
“아, 설마요….”
“좋다는 뜻이었어요.”
멋쩍게 웃음을 내보인 F는 컵을 옆에 세워두고서 접시를 집어 들었다. H가 자신의 앞머리를 내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가 찌뿌드드해진 목을 돌리다 문득 F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F가 접시를 닦던 손의 손가락만 폈다 접었다 H에게 인사를 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시야 끄트머리에 자신을 뚫어져라 보던 F가 비쳤던 탓에 H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아닌 척하려고 고개를 숙였던 것까지 말이다. F가 질투하는 걸 알아서 H가 자신의 상처 얘기를 빨리 끝냈던 것도 있었다. 그가 휴대전화를 꺼내어 시간을 확인하자 벌써 4시 30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별 얘기도 안 한 것 같은데, 시간 너무 빠르다. 30분만 더 있으면 F도 퇴근하겠네. 이대로 친구들이랑 헤어지고 F가 퇴근할 때까지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나으려나. H는 다시 휴대전화를 덮고서 친구들의 얘기에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시간을 확인하던 걸 본 R이 입을 열었다.
“시간이 벌써 이만큼이나 됐잖아. 슬슬 일어날까? T, 너 저녁 약속 따로 있다고 했으면서. 늦지 않겠어?”
“아, 맞다. 내 약속인데 어떻게 네가 더 잘 기억하냐? 나 이제 가볼게. 너희는 어떻게 할 거야?”
“나는 그럴 줄 알고 남자친구랑 만나기로 했지. 빨리 일어나. 예약시간 다 되었단 말이야.”
“참 나. 네가 제일 말 많이 했으면서 어이가 없다.”
인원수가 많다 보니 해산도 다소 소란스러웠다. H와 친구들이 자리를 정리하고서 본격적으로 헤어질 무렵엔 시간이 어느덧 5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6명이 모두 한꺼번에 카페 문을 나서자, 내부가 금세 조용해졌다. 그들의 모습이 가게 내부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즈음, E가 F에게 얼른 퇴근하라며 재촉을 해댔다. 원래도 H의 약속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퇴근시켜 줄 생각이었다는 듯 구는 E에게 F는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라며 다시 한번 부정했다. 물론 그게 E에게 통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F가 카페 문을 열자 딸랑거리는 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해가 빌딩 머리에 걸려있었다. F는 그대로 한 블록을 나아갔다. H가 가로등 아래에 서서 노을 지기 시작한 하늘을 조용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올 땐 선선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제법 날씨가 쌀쌀했다. 약속에 늦을까 싶어 급히 나오느라 외투를 챙겨오지 않은 H는 추운지 제 팔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F는 인기척을 줄인 채 H의 뒤로 가까이 다가가 자신의 카디건을 조심스레 H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H는 차마 F가 온 걸 몰랐다는 듯 흠칫 몸을 떨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F는 그 모습에 쿡쿡 웃음을 흘리며 살며시 H의 손을 잡아주었다.
“언제 온 거야. 원래 시간보다 일찍 퇴근했네. 춥지는 않아?”
“오늘은 E 씨가 먼저 퇴근하라고 해서…. 난 방금까지 안에 있다가 나왔으니까 괜찮아. …그나저나 H, 근처에 맛있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우리 외식하고 들어갈까?”
“그러자. 아, F. …있지. 오늘 고마웠어.”
그리고 F 엄청 귀여웠어. 그가 질투하는 모습을 보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구는 H의 말에 F는 차마 다음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다음에는 그러지 말라고 하려고 했는데…. 말간 미소를 지어보이는 H의 모습에 F는 순간 말문을 잃은 듯 가만 미소를 품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가슴 한편이 간지러울 정도로 심장이 세게 박동하고 있었다. F는 H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그렇게…, 함부로 만지게 하는 건 안 돼. 제법 불퉁하면서도 단호한 말이라 H는 그저 맑게 희소했다. 어, 방금 질투한 거지? 알았어, 알았어. 그가 빵 위에 뿌린 시럽보다도 달콤한 어느 오후의 질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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