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작업한 점멸의 제야 5,000~5,500자 입니다! 감사합니다! >////<!
뒷부분은 후략했습니다. 모든 저작권은 델먀(@Dermai_commi)에게 있습니다.
동야(冬夜)의 발색
⁋N&L
황토색으로 구운 타일이 톱니바퀴처럼 줄줄이 몸을 맞대고 있었다. 저 멀리 지평선을 향해 시선을 내던지자면 아까 지나쳐 왔던 것과 똑같은 색깔의 타일들이 유사한 배열로 늘어져 있었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 그 염분이 담아낸 후회가 결정이 되어 그대로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 영영 L을 찾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이 꾸역꾸역 다리를 타고 올랐다. 목소리 없는 한기가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이 도시의 돌고 도는 골목길처럼 결코 끝나지 않을 거라고 중얼거렸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같은 곳을 계속 맴돌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아하니 아마도 육체가 피로한 모양이었다. 수많은 도로 사이사이, 보도와 차도를 구별할 수 있는 차이점은 타일의 명도와 연석선뿐. 분명 처음 저택을 나섰을 때는 해가 막 지기 시작했었는데, 이제는 어느덧 빛이라곤 도로를 비추는 가로등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허공에 대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몸속을 헤집고 기어 나온 입김은 안경에 뿌연 김을 서리게 했다. 가슴을 벅차고 튀어나올 듯 구는 심장이 끔찍하게도 무거웠다. 기도를 타고 폐부로 퍼져나가는 날 선 공기가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외부로 드러난 살갗이 제멋대로 갈라진 탓에 흉측하게 거스러미가 일었다. 입안이 바싹 말라 마른침이라도 삼키려 입술을 다물었다. 생기를 잃고 말라버린 끝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쌉쌀하고 비린 철분 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허벅지 근육이 터질 듯이 팽팽하게 당겨왔지만, 나는 차마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추운 날, 당신을 찾고 있는 사람은 일찍이 나 혼자였고. 그런 내 머릿속에서 홀로 서성이고 있을 당신의 모습이 도통 사라지지를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당신은 클로크 하나 걸치지 않고서 얇은 모슬린 드레스 하나만을 입고 있었다. 겉옷을 챙긴 자신보다 더 추울 게 분명했다.
L은 절대 혼자서 저택을 나설 인물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게 아무런 언질도 없이 집안 어딘가에 숨을 위인은 더욱 아니었다. L은 나와 그녀, 자신에게 폐가 될 만한 짓을 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백작가는, 그걸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면서…. 기껏 사용인들을 조용히 불러놓고서 우리만 입 닫고 있으면 전부 해결될 거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얼마나 더 가식적이고 싶은 건지- L을 찾는 시늉을 하려는 것처럼 나를 밖으로 내보냈다. 정말 말 같지도 않은 말이었다. 그들이 죄 속물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그들의 삿된 인간성이 더욱 부각되어 보였다. 반지르르하게 기름이 흐르는 얼굴로 이참에 골칫거리인 당신이 제 발로 사라져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꼴이 말이다. 입단속을 시키는 백작이나, 그의 명령에 따라 아무런 일이 없던 것처럼 구는 사람들이나.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재차 다리에 힘을 실었다. 나만은 L을 이런 식으로 포기할 수 없었다.
코너를 돌면 모서리가 둥근 보도블록이 마치 내가 가야 할 곳을 알려주듯 굴었다. 아까와는 다른 길목이었지만, 달라진 건 건물의 외관과 그를 지칭하는 이름뿐이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한참을 내걸어도 L의 뒷모습은커녕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았다. 시야를 빼곡하게 차지한 수많은 집들이 흡사 벌집처럼 느껴졌다. 커튼을 치고, 불을 끄고. 따스한 방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사람들. 그래, 이곳은 그들의 포근한 쉼터였다. 밖에 누가 뛰어다닌들 그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담장을 높게 치고 가족 구성원에 비해 커다란 집을 짓고서 자신의 부를 과시하려 필요 이상의 돈을 써대는 종자들. 여리고 섬세한 L을 철저히 배제하는 추잡한 작은 사회. 문득 식도가 따끔거렸다. 위산이라도 역류한 모양이었다. 속에서부터 마른기침이 터져 나오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상대적인 박탈감이란 대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히 박힌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하얀 달은 드물게 커다랬지만 무엇을 비추고 있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비추지 않고 있는 게 아닐까. 사실 그런 건 다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고작 풍경이나 보자고 이 시간에 밖을 나돌고 있는 게 아니었단 말이다. 다시금 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 도시는 이렇게 넓고, 하늘은 이렇게 드높은데, 이곳엔 나의 명의로 된 집 한 채 없다는 것. 나와 L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공간 하나 없다는 것. 우리 같은 사람들은 결국 이렇게 길가를 나돌아다니다 죽을 운명이라는 것처럼…. 육체가 한계에 봉착하니 불필요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때에도 자본주의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건 그저 이 모든 것들이 내 눈에 보이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특정할 수 없었다. 단 하나로 특정 짓기 어려웠다는 말이 옳겠다. 대체 어떤 생각이 나를 이토록 씁쓸하게 만들었는지 말이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이러한 나의 비참한 고뇌가 도리어 머리를 차갑게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감정은 사람을 참절하게 만들지언정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내어주지는 않는다. 부당하다 느낄수록 침착하게 행동할 것. 나를 이제껏 살게 해준 가치관이었다. 이렇게 대책 없이 뛰어다닌다고 바뀌는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돌아가자. 돌아가서 체력을 비축하고 해가 뜨면 다시 거리로 나오자. 어차피 그들은 자기들이 L을 찾기 위해 나름 노력했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내가 당신을 찾겠다며 며칠을 밖으로 쏘다녀도 간섭하지 않을 것이 눈에 선했다. 거리에서 얼어 죽는 것보다는 그게 더 현명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은 이 추위를 이겨낼 수 있을까. 내가 발견하게 되는 건 당신의 시체일 뿐일까. 차가워진 이성으로도 나는 당신을 생각하면 무엇이 옳은 것인지 좀처럼 판단 내리기 어려웠다.
걸음은 점차 느려지고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만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새하얀 솜털처럼 작은 알알이,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렸다. 올해 첫눈이었다. 이렇게 눈이 오는 날이면, L과 같이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는 했는데. 내쉬는 숨마다 차가운 공기가 비강을 타고 스며들어 점액이 데인 듯 따가웠다.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하필 지금 눈이 내리는 거야. 짜증이 났지만, 이 감정이 향할 옳은 대상이 없었다. 차라리 내가 신을 믿었더라면 그를 원망할 수 있었을까. 의미 없는 책망이었다. 책임 회피와 다름이 없었다. 나는 이성적이어서 더욱 염세적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두 손을 들어 어느새 눈이 쌓이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머리칼이 손끝에 걸려 은근히 당겨왔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원래도 둔하던 통각이 이제는 완전히 마비라도 된 것 같았다. 어딘가 욱신거린다고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두피가 아니라 가슴 한편이었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추워서 눈이 시렸다. 단지 그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당신에게 좋아한다고 솔직히 말해볼 걸 그랬다. 다시 한번 웃음이 나왔다. N은 나를 만난 걸 후회해? …더 노력해야겠네. 당신은 짐짓 괜찮다는 듯 굴었지만, 당신의 시선에 담긴 눈빛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때 당신의 감정을 모르는 척하지 말걸. 당신이 제게 사랑을 원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한사코 거절했던 것이 한스러웠다. 당신과 나누었던 담소가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상냥하게 대답해 줄걸. 나는 유난히 둥글고도 창백한 달을 향해 시선을 내던졌다. 회백색의 크레이터가 일그러진 문양을 뽐내고 있었다. 당신도 어딘가에서 저 달을 보며 내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앞으로 나아가려고 해도 다리가 굳은 듯 더 이상 움직이지를 않았다. 여기가 정말 나의 끝인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죽으면, L이 살아서 돌아온다고 해도 행복해할까. 당신이 감기에라도 걸려 돌아온다면, 누가 당신을 성심성의껏 돌봐줄까. 시름시름 앓다가 당신도 나를 뒤따라오는 건 아닐까. 내 시체는 누가 거둬줄까. 그런 잡념들이 나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 있자면 환하게 웃어주던 당신의 소성이 한순간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환청이었다. 돌아가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딱딱한 바닥이 그렇게도 편해 보였다. 나는 머리를 좌우로 가볍게 털었다. 얼마나 밖을 나다녔던 것인지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했다. 나는 재킷 안주머니에 오른손을 집어넣었다. 끝이 빨갛게 변한 손가락이 어쩐지 뻣뻣하기만 했다. 비록 보온의 기능은 형편없는 옷이었지만 안쪽은 체온을 품어 비교적 따스했다. 한기를 머금은 회중시계를 끄집어내면 딸각, 소리를 내며 덮개가 열렸다. 시간은 새벽 2시 6분. 눈앞이 입김으로 흐려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안경알 끄트머리에 생긴 김은 이제 지워지지도 않았다. 꼭 그곳이 제가 있을 곳인 것처럼 뚜렷하게 흔적을 남겼다. 도시의 구조야 여태 한번도 이곳을 떠난 적이 없었으니 눈 감고 걸어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백작가가 있던 곳이 어느 방향이었는지는 도통 생각이 나질 않았다. 나는 가야 할 곳을 잃은 사람처럼 덩그러니 이곳에 놓여있었다. 나는 회중시계를 안주머니에 넣고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줄지어 선 가로등의 연노란색 불빛이 눈발 사이로 희미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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